묘유, 본원과 현상을 통해 둘 아닌 자리
유와 무를 초월한 묘유로 마음을 써야

우리가 무주의 공부, 무상의 공부를 하는 것은 묘유를 쓰자는 것이다.
-<정산종사 법설> 제7편 불법대해10

유는 유(有, 있음)라는 모양이 있고 그래서 우리가 자칫 거기에 머무를 수 있다. 무도 무(無, 없음)라는 상(相)이 있어 우리가 또한 그 관념의 상에 머무를 수 있다.
대(大)라 함은 우주만유의 본체를 이름이요, 소(小)라 함은 만상이 형형색색으로 구별되어 있음을 이름이요, 유무(有無)라 함은 만물의 생노병사를 이름이다. 대를 여의지 않은 소가 생멸하는 현상이 유무, 즉 유와 무다. 우리가 보고 듣고 인식하는 것은 소, 그 자체의 실상이 아니라 소의 변태를 보는 것이다. 현상의 유나 무는 끝없이 변해가는 변태의 한 단면이다. 그래서 붙잡아 맬 수가 없고 따라서 거기에 머무를 수도 없다. 그렇다고 실상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실상의 변태(用)라는 이야기다.

실상을 여의지 않고 현상을 살아가는 것이 참 삶이요 공부인의 삶이다. 굳이 유와 무로 더불어 실상을 말하자면 유와 무가 공존하는 유무동시가 실상이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현상세계에선 유와 무가 동시에 존재할 수 없기에 현상의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이다. 속성이 유와 무가 함께 있는 묘유(妙有)이기에 돌고 돌 수 밖에 없다. 이 돌고 도는 모습이 유와 무가 공존하는 실상의 모습인 것이다. 이를 일원상 서원문에서는 능이성 유상하고 능이성 무상하다고 한 것이다. 

묘유는 유무의 바탕에서 유유히 흐르며 항존(恒存)한다. 이 유와 무를 초월한 묘유와 함께 선과 악을 초월한 지선(至善), 고와 낙을 초월한 극락(極樂), 생과 사를 초월한 열반(涅槃)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공부는 묘유와 함께 지선, 극락, 열반이 그 구경처(究境處)가 되는 것이다.

간혹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견해들이 있다. 소위 선천이 지난 후천시대를 표방하며 주장하는 이들의 견해들로서 현상을 실상으로 보는 것이 진정한 자각이요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런 견해들에서는 손가락과 달의 비유에서 현상이 참달이라고도 한다. 

세세생생(歲歲生生)이란 개념과 아울러 실행(현상적 실행)이 없는 공부는 공부가 아니라는 견해와 함께 보면 꼭 맞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이는 유무초월의 묘유(진공묘유)가 주체가 돼 유와 무의 변태로 전개되는 것이 현상인 줄을 모르는 소치에서 나온 견해다. 묘유는 본원과 현상을 통해 둘아닌 자리에서 유유히 흐르는 강이다. 그래서 생과 사가 삶과 죽음이나, 시작과 끝이 아닌 변태인 것이다.

육조 혜능은 무상(無相)을 종(宗)으로 삼고, 무주(無住)를 체(體)로 삼으며, 묘유(妙有)를 용(用)으로 삼는다고 했다. 물질은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변해가고 정신은 생주이멸(生住異滅)로 흘러가 버리는 것인데, 어느 곳에 주하고 머물 수 있겠는가. 때문에 모든 것에 주할 수도 없으며, 또한 머물러서도 안된다는 것이 반야의 법이다. 대산종사는 〈대산종사법어〉 거래편 47장에서 '즐기되 고와 낙을 초월한 극락으로 즐기고, 선하되 선과 악을 초월한 지선으로 선하고, 임하되 생과 사를 초월한 열반으로 임하고, 마음을 쓰되 유와 무를 초월한 묘유로 마음을 쓰라'고 당부한다.

개념적 차원에서 보면 '지선=극락=열반=묘유'가 한 개념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진공묘유를 진공의 체와 묘유의 용으로 나눠 설명하는 수가 있는데, 이는 이 세계를 본원의 체와 현상의 용으로 보는 이분법적 세계관에서의 경우다. 그러나 진공과 묘유는 따로 분리되지 않는다. 〈정전〉 무시선법에서의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는다'는 말은 본래 둘이 아닌 진공과 묘유를 마음을 사용하는 관점에서 강연히 나눠 설명한 말이다.

부디 우리 모두 무주무상으로 묘유를 쓰는 마음공부에 공을 들여 잘하여 즐기되, 고와 낙을 초월한 극락으로 즐기고, 선하되 선과 악을 초월한 지선으로 선하고, 임하되 생과 사를 초월한 열반으로 임하고 마음을 쓰되 유와 무를 초월한 묘유로 마음을 쓰자. 

/남부민교당

[2018년 11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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