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친절은 인간관계의 미덕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절한 태도는 받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친절과 호의를 적절히 잘 베푸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친절을 처세의 수단으로 베푸는 경우도 있고, 또는 친절이 과해 적절한 선을 넘기도 한다. 깨달음을 얻은 분은 사람을 대할 때 어떤 마음과 태도로 대할까?  대종사 당시 한 승려가 왔는데, 친히 응접을 하며 화장실까지 안내하는 모습을 보고 시자가 "그렇게까지 하실 것 뭐 있습니까?" 하자 "응 그래야 한다"고 하며, 끝까지 친절히 대한 일이 있었다. 승려는 돌아가서 "과연 생불(生佛)님이다"라고 선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대산종사는 "참 수도인은 무아(無我)의 심정으로 친절을 베풀어야 교화가 된다"고 했다. 

원불교 〈예전〉에는 심지어 '길을 묻는 이에게는 간단히 답례한 후 자기 아는 데까지 친절하게 일러줄 것이니라'라는 가이드 가인까지 나와 있다. 성자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일러주실 필요가 있을까?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 성자들의 친절한 태도와 〈예전〉의 세세한 지침에는 바로 모두가 부처님이라는 깨달음이 바탕하고 있다. 해월 선생은  '사람이 바로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人是天 事人如天)고 했다. 부처님 앞에, 한울님 앞에서 오만하거나, 불손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자존심을 세울 것도 없고, 계산기를 두드릴 일도 없다. '무아의 심정으로 친절을 베푼다'는 말은, 무조건 베풀기만 하라는 단편적인 뜻은 아니되, 또 그런 뜻이기도 하다. 

부모자식간이나 직장 상하관계 등 지도해야 할 위치에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이 부처님이고, 부하직원이 부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억지로 위엄을 찾으려 하다 보면 경직되거나 권위주의에 빠지기 쉽다. 

극단적으로는 '갑질'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전 부하직원이 인터넷 댓글에 상사에 대한 부정적인 글을 썼다 해서 그 직원을 불러들여 손찌검을 한 회사 회장의 이야기가 뉴스에 보도됐다. 위협적인 언사와 폭행으로 다시는 회사나 상사를 얕보지 못하게 하려는 보복적 과시였을 것이다. 

그 회장은 모시고 섬겨야 할 부처님에게 폭력을 행사한 결과로 인간적인 굴욕, 물리적 고통을 가한 대가를 요즈음 제대로 받고 있는 듯하다.  참으로 밝은 세상, 무서운 세상이다. 

누구든지 친절하고 공손한 태도로 대하되 시비는 분명히 가려 취사할 줄 알며, 잘못은 알아 바뤄줄 줄 알되 자비의 심경으로 할 수 있는 힘은, 깊은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한 대인접물의 도이다. 깨친 성현들이 세상을 보는 안경을 빌려 쓰고 우리도 처처불상 사사불공을 흉내내다보면, 어느덧 나의 눈으로도 모두가 부처님이요, 한울님으로 보일 그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 마음을 닮아가야 겠다.

'대종사 비록 사람에게 친절하시나 그 사람이 감히 무난하지는 못하며, 혹 사람의 잘못을 엄책하시나 그 사람이 원망하는 마음을 내지는 아니하며, 비록 그가 쓰지 못할 사람인 줄을 알으시나 먼저 그를 버리지는 아니하시니라.' 

/미주총부법인

[2018년 11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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