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알베르 카뮈가 적실한 말을 했다. 이 말에 무릎을 탁 쳤다.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 잎이 꽃이 되다니. 게다가 가을은 '두 번째, 봄'이라니. 얼마나 멋진 말인가. 나무 한그루 전체가 꽃이 되는 놀라운 풍경이 벌어진다. 나무마다 활짝 피었다. 봄이 청년이라면 가을은 중년 같다. 봄은 투둑투둑 팝콘 터지듯 꽃망울 터뜨리며 제 얼굴을 자랑한다. 상큼하고 거침없다. 하지만 가을은 천천히 옷을 갈아입는다. 뭉텅이로 갈아입는다. 그래서 '물든다'고 하나보다. '꽃이 되는 잎들'은 제각각 드러내려고 안하니, 봄에 비해 더욱 여유롭고 겸허해 보인다. 꽃보다야 잎의 수가 단연 많으니, 풍요로움도 봄에 비할 바 아니다. 

언제부턴가 봄보다 가을이 좋은 것은, 어느덧 청년기를 훌쩍 넘었기 때문일까. 내가 사는 동봉리도 '두 번째 봄'을 맞았다. 동봉리는 늘 단풍이 예술이었다. 과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오밀조밀 단풍을 보노라면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이구나!" 탄성을 지르게 된다. 아름다운 곳에, 스승님 모시고 도반들과 살아간다는 것이 새삼 감사하다. 훈련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활짝 핀 예술혼으로 단풍사진을 찍곤 했다. 

그런데 아주, 아주 애석한 일이 벌어진다. 예리한 사람은 이미 눈치 챘겠지만, 앞서 내가 말했다. '동봉리는 늘 단풍이 예술이었다'라고 과거형이다. 올해는 훈련원 단풍이 폭삭 망했다. 눈을 씻고 쳐다봐도, 예년만 못하다. 무언가 부족하다. 올여름이 너무 더웠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다가도, 볼 때마다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올해는 사진도 하나도 안 찍었다. 예술혼이 도무지 차오르질 않아서다. 창밖을 볼 때마다 아쉬움에 식구들에게 말한다. '올해는 단풍이 망했어요'라고. 그런데 놀라운 깨침이 생겼다.

훈련이 시작 되고, 훈련원에 온 한 교무가 내게 말한다. "올해도 훈련원 단풍은 참 예쁘네요!" 아니라는 대답이 목구멍까지 나왔다. 저게 예쁘다니, 단풍 보는 눈이 없나? 올해는 망했다. 작년에 비하면 보잘 것이 없다. 근데, 참 이상하다. 저 사람의 눈엔 이 풍경이 아름답단다. 내 눈에 이 풍경들은 다 망한 작품인데, 저 사람은 나와 뭐가 다른 걸까. 

대종사는 "선이 좋은 것이나, 작은 선에 얽매이면 큰 선을 방해하고, 지혜가 좋은 것이나, 작은 지혜에 얽매이면 큰 지혜를 방해 하나니, 그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아니하는 공부를 하여야 능히 큰 것을 얻으리라"고 법문했다. (〈대종경〉 요훈품 5장)

난 작은 것에 얽매여서 큰 것을 놓친 거다. 작년보다 올해 단풍이 못하다고 '판단'할 수는 있다. 하지만 판단에 얽매여, 정작 올해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비교를 멈추면, 아름다운 건 다만 아름다운 거다. 작은 판단에 얽매여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바라보는 큰 지혜'를 막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다시 바라보니, 올해 동봉리의 단풍도 실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얽매였음을 깨달으니, 그제야 큰 것이 보이는구나. 그래서 수시로 반조해야 하는구나. 다시금 느낀다. 늘 묻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겠다. "지금 네가 얽매여 있는 것은 무엇이니?" 혹은 "지금 작은 것에 얽매여있는 것은 아니니?"하고.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11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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