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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의법향] 다 같이 나를 새롭게, 교단을 새롭게, 세상을 새롭게 하자
[선진의법향] 다 같이 나를 새롭게, 교단을 새롭게, 세상을 새롭게 하자
  • 정성헌 기자
  • 승인 2018.11.14
  • 호수 1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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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의법향/ 숭타원 박성경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이번 대사식에서 전산 새 종법사께서는 '나를 새롭게, 교단을 새롭게, 세상을 새롭게'라고 취임법문을 내려주셨는데 '나를 어떻게 새롭게 할까' 연구해보니, 경산종법사께서 퇴임법문으로 '신성으로, 정성으로, 중용으로 더욱 적공한다'고 한 말씀처럼 해야되겠다 싶더라. 그렇게 적공하고 적공해서 감사와 은혜와 자비로 내가 새로워지고, 교단이 새로워지고, 세상을 새롭게 해서 낙원세계를 건설하고, 여래위를 향해서 우리 모두 힘차게 공부하자."
소태산 대종사가 직접 손잡으며 키워낸 이제는 교단에 몇 안되는 친견제자로 손꼽히는 숭타원 박성경(90·崇陀圓 朴性敬) 원로교무. 까마득한 후진이 당돌하게 질문한 그의 공부표준에는, 전후임 종법사를 지극히 받들려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구수산 생불님 나셨다
영광군 군서면(현 영광읍) 녹사리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박씨네'하면 알아주던 지역유지인 가산 박형헌이 조부였다. 한학에 능해 진사 과거시험을 보러 서울로 향하다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과거를 포기하고 되돌아올 정도로 효심이 장했던 그의 조부는 이후 <동의보감>을 섭렵해 '박약방'을 열고 병약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에 힘쓴다. 유학자이면서도 불갑사에 시주를 빠지지 않고 할만큼 불심도 장했던 터라 '구수산 생불님 나셨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영산을 찾아 소태산을 알현한다.

"당신이 보실 때 꼭 공자님 같으셨대. 대종사께서 '앞으로는 상투 틀면 안되는 시대가 온다. 당신은 논밭도 있는 사람이니, 고향땅에다 교당도 만들고 유지답도 만들라'는 말씀을 하셔서 박씨 문중에 있는 큰 대밭에다 도양교당을 내셨지."

조부가 장한 신심이 나서 도양교당 창립주가 되자 부모님도 교당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셨다.

종사주 할아버지 친견하다
그가 소태산 대종사를 처음 친견했을 때는 도양교당이 세워지기 전이다. 당시 군서면에는 정식 교당 건물이 없이 산하리마을에 누에고치를 키우던 잠실(蠶室)을 빌려 법회를 진행했는데, 대종사는 영산에 잠시 머물다가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때 우리 집안에서 음식, 반찬 다해서 공양 올릴 때 할머니 곁에서 잠깐 뵈었지."

그가 두 번째 친견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의산 조갑종 대봉도 정토였던 박명선은 그의 사촌 언니로 당시 솜리(익산)에 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공부도 잘했던 그에게 조카들 공부를 맡길 요량으로 겨울방학이 되자 부른 것이다.

"언니 집에 머무른 지 3일째 되니까 언니가 '종사주 할아버지 뵈어야 한다'며 깨끗이 씻고 머리도 잘 빗으라 그래. 그때 아침 6시면 좌선 끝나는 시간인데 동네 아이들이 다 모여서 가는 거야."
언니는 "형 자, 헌 자 조부님의 손녀딸인데 앞으로 전무출신도 할 마음이 있답니다"하고 그를 소개하니, 대종사는 "내 옆으로 오너라"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대종사님 손이 얼마나 하얗고 컸는지. 그리고 참 따뜻했어. 엄숙하고 무섭기도 하고 내 마음도 다 아실 것도 같고. 그때 눈깔사탕을 주시면서 '너하고 나하고 인연이 깊다. 너 앞으로 큰일 할 것이니 공부 잘해라' 그러셔."

초지일관, 그리고 맨소래담
그는 열여섯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영산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열 살에 국민학교에 들어가던 때였다. 시국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였고, 일본은 한국 여성들을 무작정 위안부로 착출해갔다. '불법연구회에 가면 처녀들이 공부한다'는 소문에 백수경찰주재소에서 종종 영산선원을 탐문하러 찾아오곤 했는데, 당시 영산학원장으로 있었던 주산 송도성 종사는 현명하게 대처했다.

"주산종사께서 정관평에서 지은 농사를 백수면 수리조합에 미리미리 갖다 바쳐. 순사들이 영산에 오면 '어서들 오시라'고 반기면서 젊은 순사들 손 잡으시면서 조실방으로 데려가. 대접하고 등도 두드려주셔. 그러면 순사들이 고분고분 있다가 무슨 말도 못하고 그냥 가."

영산학원에 입학한 그도 남자들처럼 복장을 입고 수리조합에 가서 함께 운력했다. 수리조합쪽에서는 공양미에다가 인력들까지 와서 일을 해주니 영산학원을 함부로 건들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 운력에서 그는 낙상해 그만 허리를 다치고 만다.

운력을 나갈 수 없어 식당일을 하게 된 그는 영산 식구 70~80명이 먹을 국을 끓이는 담당이었다. 땔것도 귀해서 부뚜막에 왕겨를 넣고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풀무질을 했다. 오래하다보니 손이 터서 피가 나는데 문득 집 생각이 났다. 집에서는 머슴이 해주고, 실컷 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났다. 그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바닥에 '초지일관(初志一貫)'을 적어보았다.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서 얼른 보니까 주산종사께서 들어오셔. 얼굴에 눈물자국하고 바닥 글씨를 보시고 '거기다 초지일관이라 썼냐?' 하시고는 좀 있으시더니 '초지일관해야 큰 도인된다' 하셔."

그의 부르튼 손을 만져주며 주산종사는 "손이 텄구나. 내가 약을 줄 테니 발라라. 그리고 내가 주었다고 하지 말아라" 하며 맨소래담을 갖다줬다. 그는 저녁이면 스승님이 주신 것이라 아껴 쓰려 했지만, 옆에서 그것을 본 동지들도 너도나도 발라보자며 달려들어서 몇일 못가 다 쓰고 말았다.

신의일관하면 하늘의 인증 받아
그렇게 영산선원 2년을 보내고 총부로 온 그는 정광훈 선생 밑에서 수입지출 개인내력 쓰는 업무를 꼼꼼하게 배웠다. 그리고 구타원 이공주 종사 식사배달, 아침마다 정산종법사가 드시는 깨끗한 냉수를 떠다 드리는 일을 만 2년 동안 한번도 빼지 않고 해낸다.

이후 그는 항타원 이경순 종사를 따라 개성교당으로 발령받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 힘썼다. 그때 정산종사가 그에게 보낸 글이 <한울안한이치>에 실려있다.
'뜻을 세움이 태산 같으면 불과를 가히 기약할 것이요, 정진하고 퇴전하지 않으면 삼대력이 점점 커나니라. 신의가 일관하면 사람과 하늘의 인증을 받을 것이요, 부지런히 제도 사업하면 중생을 복되게 하리라.'

영식이 저것 같으면 할 것이다
"영식(젊은 시절까지 그의 법명이었다)이 저것 같으면 할 것 같다"며 이공주 종사에게 인정받았던 그는 당리교당 재임 이후 본격적으로 교화에 두각을 나타낸다.

원기42년 동래교당 재임시 동래지부 봉공회 발족, 부산 동래고등학교 원봉회 결성, 동래지부 청년회 결성 등 영남의 새 교화바람을 일으키며 부산 거제에 연원교당을 냈다. 또 원기56년 광주교당에 발령받은 그는 일인일도(一人一導) 장려운동을 펼치며 150명 출석을 달성해 전국 교화 연원달기 1등상을 차지하며 교단적 입교출석 선풍도 일으켰다. 연원으로 송정리교당, 나주교당, 화순교당을 냈다. 원기62년 서울교당에서는 서울 원광유치원을 개원하고 조치원에 연원교당을 냈으며, 원기67년 수위단원으로 선출돼 원기71년 대전교구장으로 부임한다.

대전교당에 재임한 그는 노태우 정권 때 대전 2만호 영세민 주택 정책에 힘입어 대규모로 열리는 정부 복지관 및 어린이 교육기관 사업을 독식하려는 이웃종교의 전략을 간파했다. 그는 공정한 심사 및 정책이 이뤄질 수 있도록 다방면에 힘쓴 결과 원만하게 해결돼 대전지역 원광어린이집 시대를 개척해냈고, 대전교구 꿈밭 창립, 중리복지관 개관, 원광수양원 신축봉고 소식을 알렸다. 연원교당으로 둔산교당을 내기도 했다.

없는 교도들을 항상 먼저 챙겼어
그가 이러한 대사회적 교화를 크게 이뤄낼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약자를 먼저 생각하는 순일한 자비심 때문이었다. 광주교당에서 전국교화 연원달기 1등을 할 때에도 그는 지역주민을 위한 무의촌 의료봉사를 일으켰고, CAC산하 무의탁 모범사병을 초청해 위로법회 및 부대 출장법회를 시작했다. 노인들을 위한 출장법회도 챙겼다. 대전에서도 대각개교절이면 환경미화원 수백여 명을 초청해 위로잔치를 열었고, 시내 택시기사들을 위해 3천여 켤레의 장갑을 각 교당 인근 주차장에서 챙겼다. 대전 소년원 기념법회 및 소년원 정례법회도 꼭 챙겼다.

"없는 교도들을 항상 먼저 챙겼어. 있는 교도와 없는 교도가 같이 오면 있는 교도에게는 그냥 합장인사를 했지만, 없는 교도는 손을 먼저 잡아드렸지. 있는 교도들은 이런 것으로 질투하지 않아. 그래서 교화계에 있는 동안 교도들과 한번도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지."

심장병 어린이 돕기, 중앙훈련원 보은성금 모금운동 전개, 남미 칠레교당·미주선학대학원 협력기부 등 어려운 여건에서도 힘닿는대로 교단 대소사를 반드시 챙겨왔던 그는 원기101년 종사 법훈을 서훈했다.

[2018년 11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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