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진수 교무] 우리나라의 음다 문화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유입된 것으로 짐작된다. 먼저 우리나라 초기의 차 문화를 보여주는 일련의 기록들(충담사, 보천과 효명 태자 이야기)은 승려들의 헌다에 관한 것이다. 

나아가 우리 불교를 이끈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개산조들은 거의 모두가 중국 강서 홍주의 마조도일 문하에서 수학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강서 홍주의 선종은 중국에서도 선다 문화의 본산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구산선문의 개산조들은 여기서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 동안 불법을 익히고 돌아왔다. 따라서 이들이 불법과 더불어 다법을 전수하고 돌아와 구산선문을 열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말여초의 구산선문 개산과 더불어 시작된 우리의 음다 문화에서 선차(禪茶) 문화가 선도적 역할을 했으리라는 점은 그 정황이 뚜렷하다. 고려는 신라의 문화를 계승해 불교를 숭앙했으니 고려의 차 문화는 더더욱 선차 문화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는 고려의 가장 성대한 국가 의례였던 연등회와 팔관회에서 헌다 행사가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음을 봐도 알 수 있다.

연등회와 팔관회는 건국 초기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 가운데 제6조에서 '연등은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고, 팔관은 천령·오악과 명산·대천과 용신을 섬기는 것이다. 훗날 간특한 신하가 더하거나 줄이자고 건의한다면 꼭 그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하여 국가의 대사로 지낼 것을 훈유한 만큼 고려 일대에 걸쳐 엄격히 시행됐다. 

이 행사들은 여러 날에 걸쳐 제1부 편전 의식, 제2부 진설 및 좌정, 제3부 연회의 순서로 진행됐는데, 그중에서도 행사의 중심인 연회에서는 처음 왕에게 차와 꽃과 술을 올리면 이에 답으로 왕이 연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차·꽃·술·봉약·과실을 하사하는 절차로 이뤄졌다. 나중에는 이 부분이 부처님 전에 향·등·차·쌀·과일·꽃을 올리는 육법공양으로 발전됐다. 고려시대에 차는 승려뿐만 아니라 사대부 계층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는데, 선승이 아닌 이들 사대부들조차 차와 선을 동시에 노래할 정도로 선차의 세계에 깊이 빠져 있었다.

제22회 익산 차축제에서 참가자가 다도를 선보였다.

다선일미(茶禪一味)를 노래한 대표적인 선승으로 고려 말의 백운경한(1299~1374), 승려가 아니라 유학자인 이규보(1168~1241) 같은 이도 '다선일미'의 경지를 노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가 하면 나옹혜근(1320~1376) 선사는 한 게송(偈頌)에서 다선일미의 참다운 경지로 읊었다. 이처럼 고려에 있어서 차는 선의 수단이자 화두이며 선 그 자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조선의 개국 이후 차 문화는 전반적으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됐는데, 이는 정확히 숭유억불에 의한 불교의 쇠퇴와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사찰들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고, 승려들은 더욱 선(禪)에 매달렸으며, 따라서 차 문화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차의 선적인 성격은 오히려 강화되기에 이르렀다. 안빈낙도와 은거를 택한 선비들의 경우에도 산중의 승려들과 마찬가지로 차와 선을 동일시하는 노래를 남기기도 했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대표적이다. 그는 사대부의 신분이었음에도 산간에 들어 흙바닥에 등을 대고 자면서 땅 화로에 물 끓여 달인 차를 마시는 일만이 즐거움을 준다고 했으니, 이런 정신적 경지는 선종 승려들의 다선일미 사상과 다른 것이 아니다. 

면면히 이어진 조선의 선다 문화에서 후기의 핵심적 위치에 있는 인물이 바로 초의의순(1786~1866)이다.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東茶頌)>을 남긴 초의 선사의 일상은 그야말로 선정과 음다가 전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선정에 깊이 들자 죽로(竹露)가 식어 남은 불씨를 지피려 구리 화로를 당기네'라는 시가 이를 웅변한다. 그야말로 차와 선이 하나인 생활이고, 차의 맛과 선의 맛에 구별이 없는 경계에 있음을 짐작케 한다. 

[2018년 11월16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