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삶은 선(禪)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고 의구심을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사실은 누구나 선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것을 자각하고,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가, 그렇지 않고 그저 운명에 맡기고 사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차를 운전하는 예를 들어보자. 그 이유는 운전이 인생의 축소판인 동시에, 선이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차를 몰기 시작했다고 가정하자. 도로는 삶의 한 가운데를 의미한다. 인생의 길을 가는 것이다. 골목, 국도 혹은 고속도로인가에 따라 속도가 다르다. 국도에서 고속도로처럼 속도를 낼 수는 없다. 고속도로에서도 골목길처럼 천천히 갈 수 없다. 수많은 차량이 얽혀 있는 상황에서 내 맘대로 속도를 낸다고 해서 다른 차량들도 같은 속도를 내주지 않는다. 인생이 그렇다. 이 세상은 함께 가는 것이다. 인류 역사 또한 마차를 타고 다니던 시대에 정보기술혁명이 없었듯이, 민주화된 시대에 왕권으로 회귀할 수 없는 것처럼 동시대의 흐름이 있다.

자, 핸들을 잡고 계속 가보자. 나는 앞차와의 간격을 지키고자 애쓴다. 그런데 누군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화를 내고 싶지만 참는다. 갑자기 뒤의 차가 무섭게 따라붙는다. 경고를 보내고 싶지만 참는다. 트럭에 실린 물건이 떨어져 내 차로 쏟아질 것 같다. 불안함에 얼른 차선을 바꾼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되도록 질서를 지키고 싶지만, 나를 속이거나 밟고 넘어가는 황당한 일도 있다. 나 또한 욕심껏 달리고 싶지만 사고를 낼지도 모른다. 연일 보도되는 교통사고는 물론 욕망으로 자신과 이웃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역행보살(자신의 잘못으로 남에게 교훈을 주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본다.  

이제 너른 고속도로로 나가자. 간혹 눈살 찌푸리게 하는 운전자들도 있지만, 비교적 안전운행들을 하고 있다. 요새는 고정된 속도로 운전하게 하는 크루즈 기능도 있지만, 어쨌든 모든 감각은 차의 기능을 파악하며 앞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방어운전으로 긴장되어 있다. 아니 능숙한 운전자라면 음악을 들으면서도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나아가 전방만이 아니라 후방과 좌우 상황, 차의 건강 상태를 순간순간 점검한다. 이제는 편안하게 운전대를 잡으며, 휴대전화의 블루투스 기능으로 사무실 동료와 내일 회의에 대한 준비도 한다. 차의 모든 계기판은 완전히 나의 감각 속에 있고, 도로상의 모든 변화에 대한 대응도 자동적으로 하고 있다. 규정 속도를 넘어섰거나 앞차가 속도를 줄일 때는 자동화된 의식으로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줄인다. 비가 오면 와이퍼도 자연스럽게 작동시킨다. 추월선이나 주행선을 자유자재로 드나든다. 때로는 비상등으로 감사와 미안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도로와 차들과 변해가는 풍경과 어떤 갈등도 없다. 이를 굳이 의식하지 않는다. 일심 속에서도 마음은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것은 진공이다. 차들과 함께 달리면서도 나의 모든 감각은 온전하게 기능한다. 내 차는 이웃 차들과 하나가 되어 행선지를 향해 유유히 흘러간다. 운전한다는 마음도 없이 운전한다. 묘유의 작용이다. 나는 나의 삶을 불지(佛地)로 실어 나르는 운전수다. 

/원광대학교

[2018년 11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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