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도성 도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 하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위 시는 조선불교유신론으로 유명한 승려 시인 만해 한용운의 시 '복종'이다. 만해는 이 시를 통해 '자유'와 '복종', 거의 두 개의 시어만을 가지고 아름다운 절창을 만들어내었다. '복종'이라는 말은 그 이미지가 억압과 강요, 그리고 위력으로 어쩔 수 없이 형성된 수직적인 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시에서는 그런 고정된 이미지를 시원하게 뒤집는다. 자유는 누구나 좋아하고 추구하는데 비해서, 복종은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행위지만,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자발적인 복종'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하고 행복하다는 역설이다. 자발적인 복종이야말로 더 큰 자유를 위한 자기 헌신이므로.

한용운의 시 '복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법문이 있다. '참 자유는 방종을 절제하는 데에서 오고, 큰 이익은 사욕을 버리는 데에서 오나니, 그러므로 참 자유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계율을 잘 지키고, 큰 이익을 구하는 사람은 먼저 공심을 양성하나니라.'(〈대종경〉 요훈품 42장) 

'참 자유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계율을 잘 지키고' 하는 말씀 속에 한용운의 시 정신이 담겨 있다. 참 자유는 걸림 없고 속박 없는 해탈일진대, 계율은 도리어 구속이 아니던가. 자유가 좋다하나 방종으로 흘러 법망에 갇히면 도리어 구속이요, 계율(복종)은 통제와 구속이지만 도리어 심신 간에 힘을 길러 속박을 여의고 마음의 자유를 얻는데 힘이 되는 것이니, 자유와 구속이 어디 따로 있는가. 

그러나 계율은 권장보다는 금지를 위주로 공부인들을 제어하므로, 사람의 순연한 정신을 억압하는 기제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교의품에 나오는 어떤 목사의 제언은 바로 그러한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예로부터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대개 계율을 말하였으나 저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도리어 사람의 순진한 천성을 억압하고 자유의 정신을 속박하여 사람을 교화하는데 적지 않은 지장이 되는가 하나이다.'(교의품 25장) 

이에 대한 대종사의 답변은 단호하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면 일동일정을 조심하여 엷은 얼음 밟는 것 같이 하여야 인도에 탈선됨이 없을 것이며, 그러므로 공부인에게 계율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하노라.' 아울러 우리 계율이 번거롭지 않고, 가장 기본적인 서른 가지 계문에 그치며, 계율을 주는 방식도 사람의 정도에 따라 단계적으로 준다는 점을 강조하여 우리 계율의 합리적인 측면을 밝히고 있다. 

〈정전〉 참회문에서도 '근래에 자칭 도인의 무리가 왕왕이 출현하여 계율과 인과를 중히 알지 아니한'다고 개탄하는 것을 보면, 계율의 편견을 깨고, 계율에 담긴 종교적 가치를 중하게 드러내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계율은 '아름다운 자유'를 위한 '자발적인 복종'이므로.

/원경고등학교

[2018년 11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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