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여객자동차(주) 성한경 회장
직원과의 혼연일체에 역점
직영제 전환, 경영능력 길러

[원불교신문=이은전 기자] 부산 여행 꿀팁을 제공하는 블로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1006번은 해운대에서 영도까지 광안대교를 통과하는 노선의 시내버스다. 해운대 벡스코에서부터 영화 '변호인'으로 유명한 흰여울문화마을, 해운대 마린시티, 광안대교, 부산항대교 등 부산의 명물을 거쳐 가며 바다 조망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노선으로 유명한 이 버스는 신한여객 소속이다. 영도를 기점으로 부산 전역을 달리는 200여 대의 시내버스를 소유하고 있는 신한여객자동차(주)는 명실상부한 부산지역 시내버스업계 최고의 기업이다.

신한여객은 대중교통이 전무하던 시절, 6.25 전쟁 피난민으로 인구가 급증한 부산에 일신여객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회사다. 영도구민의 발이 되어주는 신한여객의 성한경(법명 도영·청학교당) 회장을 모르면 속된 말로 간첩이다. 성 회장의 출생, 성장, 기업, 정치, 봉사 등 모든 삶이 영도에 녹아 있다. 넓은 바다로 향하는 배를 볼 때마다 세계 각국을 누비는 꿈을 꾸며 자랐다는 그는 부산 시민의 발을 책임지는 버스 회사를 일궜다. 

성 회장을 만나러 들어선 부산시 영도구 동삼동에 위치한 신한여객 본사 회장 집무실의 소박함은 '복생어청검(福生於淸儉)'이라는 그의 생활신조와 맞닿아 있었다. 1951년 설립 이후 개인차주 즉 지입제로 출발해 정부시책에 따라 직영제와 2007년 준공영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련과 역경 속에서 지금의 신한여객으로 성장해 온 역사는 오롯이 그의 손때와 같이 한다. 

"학창 시절 정치를 꿈꿨고 대학 졸업 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경영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는데 선친의 부름을 받고 학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버스 운송사업은 개인 소유의 차량을 등록시킨 위탁 형식의 지입제 운영이었고 부산 전역에 400여 대의 버스를 운행하고 있던 신한여객도 마찬가지였다. 1969년 정부는 지입제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직영제로 전환하라는 정책을 발표했다. 회사의 근간이 송두리째 바뀌는 일이라 감당이 안됐던 선친이 경영을 전공한 그를 불러내려 막중한 업무를 맡긴 것이다. 

"아버지의 부름으로 입사해 각고의 노력 끝에 직영제로 마무리하는데 8년이 걸렸어요. 전국에서 가장 빠른 성과였습니다."

직영제로 산업화에 성공한 신한여객은 1977년 5월 회사를 정비하며 주주총회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그는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처음 총무과 말단 직원으로 입사해 회사 내 여러 직책을 거치며 경영 수업을 쌓았고 직영제 관련 업무를 해결하면서 내공을 키웠다. 사내 업무를 두루 거친 경력은 1,500여 명의 직원을 통솔하는 경영 능력에 밑바탕이 됐다. 그의 탁월한 경영 능력은 선친으로부터 이어받은 신한여객을 유한여객, 미광택시, 수영가스, 태종대온천, CNG충전소 등 5개의 계열사로 확장시켜 놨다. 

업계 최연소로 부산광역시버스운송조합 이사장에 피선돼 1982년부터 제6대, 제9대, 제10대 등 3대에 걸쳐 역임하면서 버스업계의 숙원사업이었던 버스공제조합 설립과 전국에서 최초로 조합회관을 완공했다. 이처럼 기업인으로 사회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탑산업훈장, 새마을훈장도 수훈했다. 

"내가 다 겪어봤기 때문에 직원들이 애로사항을 들고 오면 훤히 짐작됩니다. 직원들과의 혼연일체를 가장 중요시해 대화도 상시로 하고 노조도 매우 활성화돼 있어요."

노사 간 상호신뢰 못지않은 신한여객의 큰 자랑은 '새마음 봉사대'다. 1979년 버스 안내양과 운전기사 17명의 고아원 방문으로 시작된 봉사활동이 내년이면 40년이 된다. 연간 천여 명이 교통사고 예방활동을 하는 등 양로원, 아동재활원, 불우이웃돕기, 자연보호활동, 농촌일손 돕기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발한 봉사활동을 벌여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상 등 상도 여러 번 받았다. 

"새마음 봉사대의 가장 큰 업적은 안전운행입니다. 버스 안내양과 운전기사들의 자발적인 봉사활동으로 본인들부터 교통 질서를 철저히 지키는 것이 몸에 배다 보니 대형사고가 거의 없는 겁니다. 제가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았지요."

태풍 '사라'때 큰 피해를 입은 영도구민들을 버스로 피난시키고 영도의 버스 노선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유한여객을 인수하는 등 그는 '영도의 발'임을 자처한다.

"영도에서 받은 은혜, 영도에 갚겠습니다. 남은 생을 '봉사를 위해 보낸 삶이 오직 열매를 맺는 삶이다'라고 말한 성자 간디의 말처럼 지역주민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지역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이모부 성산 성정철 종사의 영향으로 외가가 원불교에 귀의하면서 그도 29세 때 입교했다. 지난해 물러날 때까지 39년간 청학교당에서 교도회장을 맡아왔고 부산울산교구 교의회의장도 역임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인생과 궤적을 같이 하고 있는 청학교당에 1억을 쾌척해 '영인장학회'를 만들었고 장학생을 선발하는 일에도 열정을 쏟고 있다. 

[2018년 11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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