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진리를 본체와 현상으로 나눠 보는 것은 '현실 너머에 무엇이 있지 않을까'하는 이성적인 사고 때문이다. 서양은 플라톤 이래, 동양은 유불선 삼교가 함께 진리를 두 세계로 파악하고 그 관계를 어떻게 규정지을 것인지 고민했다. 이를 실제와 가상, 원본과 복사, 유와 무와 체용, 이와 사, 진공과 묘유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진리계의 두 세계가 인간의 마음에도 그대로 투영돼 있다고 봤다. 

두 세계로 나눠진 진리는 하나로 통합된다. 일원상의 진리는 그 통합된 세계를 말한다. 그리고 일심(一心)은 일원상의 진리가 나를 통해 구현되는 것을 말한다. 무시선의 근본은 여기에 있다.

그 핵심은 <금강경>의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한 구절로 귀결된다. 분별 집착함이 없는 마음, 그것이 일심이다. 역으로 그 원리 또한 진공과 묘유에 있다.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 고오운 상좌아이도 잠이 들었다. /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 서역(西域) 만리(萬里)길 /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이 시는 조지훈의 '고사(古寺)1'라는 시다. 여기서는 진리의 존재방식인 연기(緣起)를 잘 나타낸다. 상좌와 부처님과 눈부신 노을과 모란이 공존한다. 세계 모든 실상의 존재 모습이다. 그것의 구조는 진공과 묘유다. 부처님의 웃음은 진공을 말하며, 시공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이 세계의 나타남은 묘유다.

<금강경 오가해>에서 야보도천(冶父道川) 선사는 또한 이렇게 읊는다. "홀로 조용히 텅 빈 방에 앉아 있으니 / 더더욱 동서남북은 없도다. / 봄볕의 기운 빌리지 않더라도 / 복사꽃 온통 붉게 피는 것을 어찌하리오." 우리 한 마음이 무명에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 모든 현실은 무한한 은혜 덕상(德相)의 꽃을 피운다. 텅 빈 적멸의 마음 한 가운데에서는 삼라만상이 회통하기 때문이다. 진공과 묘유는 이처럼 한 마음으로 드러난다.  

성상(性相), 즉 우리 마음은 근본을 뜻하는 본성과 생멸 변화하는 모습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일원은 일체중생의 본성이므로 체용은 마음의 성상으로 나타난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의 해석에서 두 세계로 나뉜 일심을 이렇게 말한다. "염정(染淨)의 제법은 그 본성을 둘로 나눌 수 없으며, 진망(眞妄)의 두 문은 다름이 있을 수 없으므로 하나라고 한다. 이 둘이 없는 곳이 제법 가운데 실재로서 허공과 달리 본성 스스로 신비스럽게 알기에 일심이라 이름한다." 

바람을 무명, 파도를 생멸, 바닷물을 진여에 비유한다면, 무명과 생멸이 진여를 떠나지 않음을 아는 것은 이처럼 신묘한 이해력을 가진 우리 마음이다. 

마음의 근원인 법신불은 능이성유상하고 능이성무상하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일심은 진공과 묘유인 진여문과 생멸문의 두 문을 포함한다고 한다. 따라서 법신불과 하나인 우리 마음에서 각각 진공묘유의 수행문과 인과보응의 신앙문이 전개된다. 일상의 수행인 무시선 무처선과 일상의 신앙인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기반이다. 중국에서 발달한 선수행의 궁극은 진공을 떠나지 않은 이 묘유의 세계가 곧 불토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주객을 초월한 일심으로 이 세계를 바라본다면 세계의 주인공으로서 곳곳이 부처임을 알고 불공하지 않을 수 없다.  

/원광대학교

[2018년 11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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