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처음 원불교학과에 입학했을 때다. 신입생들은 '입방식'을 했다. 각 방을 돌아다니며, 그 방의 '실장'이 주는 미션을 해결하는 것으로 배움도 얻고 친목을 다진다. 노래도 부르고 목탁도 치며 각 방을 통과하고, 세 번째 방 앞에 섰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실장이 말했다. 방문 앞에 붙어 있는 종이를 봤느냐고. 종이를 못 봤던 나는, 다시 보고 온다. '하얀 종이에 물음표 하나'가 그려져 있다. 실장은 묻는다. "방문 앞에 뭐가 붙어 있어요?" "물음표요!" "그게 무슨 뜻일까요?" 실장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대답을 못하자  다시 나가서 보라고 한다. 

방문 앞에 물음표를 본다. 뭐 암호 같은 것이 숨겨있나 열심히 쳐다봐도 '단지, 하얀 종이에 물음표 하나'가 그려져 있을 뿐이다. 방에 들어온다. "무슨 뜻일까요?" 또 물어본다. 음, 이제부턴 '아무 말 대잔치'다. "늘 물음을 가지고 살라는 뜻 같습니다." "아닌데요, 다시 보고 오세요." 또 물음표를 보고 왔다. "무슨 뜻일까요?" 좀 원불교적으로 말해야 하는 건가, 나한테 원하는 대답이 대체 뭐지. 머리가 복잡하다. "수행자로서 의두를 품고 살자는 말 같습니다." 아니란다. 또 묻는다. 또 대답한다. "물음표를 느낌표로 만드는 수행을 하라는 뜻 같습니다!" 또 아니란다. 짜증이 올라온다. 또 보고 오란다. 아! 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화가 살짝 난 나는, 되묻기 시작했다. 

"대체, 답은 있는 건가요?" 실장은 빙긋 웃더니, 또 물음표를 보고 오란다. 그리고 또 묻는다. "무슨 뜻일까요?" 벌써 물음표를 6번은 넘게 보고 온 것 같다. 징글징글하다. 이제 더 지어낼 말도 없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나는 냅다 소리 지른다. "모르겠습니다!" 그제야 실장이 활짝 웃었다. "네, 모르겠죠? 당연히 모르죠. 앞으로도 살면서,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 하세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모른다' 할 때까지 소요된 시간이 '나의 아집과 편견의 무게'를 보여준다. 곧바로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한, 맑은 이도 있었을 거다. 물음을 6번도 넘게 받는 동안 내 자존심이, '모른다'를 허락지 않았다. 상대에게 '정답을 말하고 싶은 나'가 똬리를 틀고 앉아, 대답을 빙자한 소설을 쓰는 중이었다. 

대종사는 과거부처의 십대 제자에 대해 <대종경> 교단품 42장에서 '대중을 인도하기 위하여 아는 것도 모르는 체하고 잘한 일도 잘못한 체하며, 또는 탐심이 없으면서도 있는 듯이 하다가 서서히 탐심 없는 곳으로 전환도 하는' 그 자비심과 공덕을 칭송했다. 

십대 제자의 행동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괘념치 않기에 가능하다. 자비심만 있을 뿐, '나'가 없다. 반대로 나는 그날의 충격을 뒤로하고도, 오랫동안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지 못했다. 잘못한 것도 잘한 체 포장했다. '나'가 창궐해서 그랬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심플함,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말 하는 그 단순함조차도 언제나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대 제자의 자비와 공덕은 언제나 내 마음에 담아있다. 그렇게 마음에 가득 담아지면 '나도 모르게 체 받아지는 날' 그런 기쁜 날도 있지 않을까. 

/중앙중도훈련원

[2018년 11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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