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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4월22일 전남 장성에서 한의사 변복연의 장남으로 출생한
동화(東華)는 12~18세를 전북 부안 계화도에서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간재 전우 선생 문하에 한학을 공부한다. 

1919년 신교육 준비 차 상경했는데 부친을 따라 귀향하였으나 가출하여
지리산 천은사 하용하 스님 문하에 입산수도하다
큰 뜻을 품고 서울 중동고보에 입학, 휘문고보를 거쳐 1921년 해외유학을 떠난다. 


독일인 교수가 독일어로 강의하는 상해 동제대학 의학부 산부인과 학생으로
1924년 상해 한인유학생 총무 및 집행위원
1926년 한인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임시정부 대의사로 독립운동을 한다. 

1928년 4월 일경에 체포되어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신의주와 평양에서 5년의 옥고를 치루며
동화란 이름을 극(極)이란 외자로 개명하고 산부인과 분야에 노하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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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을 마친 후 1932년 고향으로 내려와 금광채굴사업에 전력하다가
사업을 정리한 후 귀향하여 전남 화순에서
집을 짓고 장성에 있는 전 가족을 데려와 한약방을 개설하여 인술을 베푼다. 

해방이 되던 1945년 상경하여 '민의사(民意社)'라는 정치단체를 조직하였으나
좌우 대립의 와중에 회의를 느끼고 귀향하여
화순군 벽지에 이서북국민학교를 설립하고 후원회장으로 어린이 교육에 힘쓴다. 


서울정치대 강사로 6.25 피난길에 익산총부에서 정산종사를 뵙게되니
"앞으로 와서 살 곳이니 살펴보고 가라."고 하신다. 
전남대학교 독일어, 문화사, 한국독립운동사 교수이자 독립운동가로 알려진다. 

이 지역에 영향력 있는 동광사 불교 신자들의 선우회 2회 회장으로
빛고을 광주의 유지들을 교화하는 한편
많은 불심 주부들이 희망하는 아이를 갖게 하는 한의사로 선망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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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일찍이 정산종사님을 만나 원불교에 깊이 공감한 바 있어
광주교당에서 중선이라는 법명을 받고 개종하니
이 지역 사람들에게 신종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신선한 충격이라 하겠다. 

동광사 선우회 초대회장으로 다음 회장인 변극 교수의 권유에 응한
광주지방법원 송화식 판사는 어떤 기대에
전북 익산총부 조실에서 정산종법사를 뵙고 청순 화열한 인품에 감명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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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임종을 지켜보는 장녀 송례성에게 당부 말씀하시니
"나는 구불교 신도회 회장까지 맡고 있으나
원불교는 미래의 새 종교이니 너는 거기에 나아가라"고 유언하신 것이다. 

1961년 서울 종로교당을 찾아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입교하여
그 후 내산 김경원 부군과 중구교당에 다니며
시누이 신타원 김혜성 종사, 조카 홍도전 대호법을 인도한 혁타원 종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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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은 막내 여동생 성묵에 이어 자신도 정년퇴임과 동시 출가하여
중앙요양원장, 법은재단 이사장으로 헌신 봉공하며
소남훈련원의 소남 김정광(영현), 수계농원 은산재단 은산 김현관 대호법과
근산 지해원 종사, 미산 오미산 예감을 새 회상에서 다시 만난 기쁨에 산다. 

1972년 12월 문교부 당국으로부터 원광대학교 한의예과 설립인가를 받아
1973년 한의과대학 초대 학장으로
한의과대학에서 의과대학, 치과대학, 원광의료원으로 발전하는 기반을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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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이면서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은 교육자인
선산 변중선 선진이 1980년 3월25일 열반하니 이에 대산종사 말씀하신다. 
"이분은 독립투사로서 이 나라에 공헌도 많이 했을 뿐 아니라
노년에는 '칠보가 보물이 아니라 자기 생사를 해탈하는 것이
참으로 귀한 보물이라'는 자각에서 재색명리를 다 던지고 출가하였으나 
그때 이미 항마로 출가하였다. 
독립투사로 이 교단에 전무출신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니 기록하여 전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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