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도성 도무] 〈정전〉에서 본격적인 교리가 담긴 교의편 제1장에는 일원상의 진리, 일원상의 신앙, 일원상의 수행, 일원상 서원문, 일원상 법어, 게송이 배치되어 있다. 대종사를 비롯한 제불제성이 깨달은 진리, 일원상  (○)을 상징으로 표현한 진리의 모습을 간이하게 밝혀놓았다. 간이하다는 건, 겨우 4쪽밖에 되지 않는 분량으로 진리의 핵심 내용을 담았다는 것이다. 

그 중에 '일원상 법어'는 '이 원상의 진리를 각하면'이라는 전제를 두고, 이러한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 알게 되는 바를 여섯 가지 내역으로 드러내고 있다. 큰 일원상을 먼저 그려둔 것은 일원상이 진리의 상징임을 분명하게 부각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왜 대종사는 진리를 '각'하지 못한 우리들에게 '진리를 각하면' 알게 되는 바를 미리 알려줬을까. 추측컨대 깨달은 진리의 내역을 미리 보여준 것은 깨달음(각)의 표준을 보여준 것이고, 비록 깨닫지는 못했다 해도 진리의 도면을 그려줌으로써 그 길을 찾아가는 이정표를 삼으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래서일까, 그 문장들이 참 따뜻하다. 나누고 분별하고 주착되는 마음을 넉넉하게 풀어놓아 준다. 생로병사는 춘하추동과, 인과보응은 음양상승과 연결 지어서 일러준다. 또한 진리는 꽉 차 있고 다 갖춰 있으며, 지극히 공변된 것임을 쓰다듬듯 알려준다. 우리가 찾아가는 진리의 길이 이런 길이니 어서 오라고 품을 열어주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법어도 아주 쉬운 문장이지만 반복과 균형으로 도리어 파격을 이룬다. 작은 일원상 여섯 개를 그려놓고 같은 문장을 똑같이 반복함으로써 어느 하나 치우침 없이 육근을 대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원만 구족'과 '지공무사'는 육근을 사용할 때의 활용 지침이다. 

말하자면, 큰 일원상과 같이 우주에 편만한 진리의 상징을 두고, 다시 작은 일원상을 둔 것은 다만 진리 내역을 아는 데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삶 속, 생활 속, 일상 속에 활용해야 함을 적실하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진리는 가만히 모셔놓는 것이 아니라 육근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라, 이는 대종사가 '공부하는 사람이 현묘한 진리를 깨치려 하는 것은 그 진리를 실생활에 활용하고자 함이니, 만일 활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둔다면 이는 쓸 데 없는 일이라'(〈대종경〉 교의품 8장)고 한 말씀과 같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아름다운 법어를 어찌 모셔 두고만 볼 것인가. 생각해보면 반야심경이 진리도 깊어서 독경을 할 때에 일원상서원문과 함께 읽는 경전이기는 하나, 무·불(不)·공과 같이 그 '없는 자리'만 밝힌 반야심경보다 더 원만한 진리가 '일원상' 장에 다 담겨 있는데, 사용하는 언어도 너무나 다른 반야심경을 굳이 읽어야만 하는 것일까. 할 수만 있다면 '일원상의 진리'에서부터 '게송'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독경했으면 좋겠으나, 의례와 의식을 행함에 조정이 필요하므로 '일원상 법어'만이라도 반야심경 대신 독경했으면 좋겠다. 표현한 문장도 좋고 내용이 긴요하며 적당한 분량인지라, 거듭 독경함으로써 진리의 내역과 진리의 활용과 대종사의 자비를 두고두고 가슴에 새기고 싶기 때문이다.

/원경고등학교

[2018년 12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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