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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익선 교무의 현대문명과 〈정전〉 86. 일심과 정의
원익선 교무의 현대문명과 〈정전〉 86. 일심과 정의
  • 원익선 교무
  • 승인 2018.12.06
  • 호수 1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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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일심은 분별과 집착이 없으며, 선악과 염정을 초월하고, 주객과 진속을 둘로 보지 않는 동시에 허공처럼 텅 비어 있으되 맑고 두렷하며, 일체를 파악하는 지혜의 능력과 세계를 하나로 품는 마음이다. 승조(僧肇)는 <조론(肇論)>에서 "성인은 (반야의 지혜로써) 신령하다. 마음에 번뇌가 텅 비었으나 관조의 작용을 잃지 않는다. 형상도 명칭도 없기 때문에 관조로 작용을 해도 실지 그 자체의 텅 빈 마음을 잃지는 않는다"고 한다. 

무시선법에서 정할 때 일심을 양성하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우리 내면의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불심을 회복하라는 뜻이다. 이 일심이 어떤 일,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대로 발현된다면 정의가 된다. 정의는 모든 판단과 행동이 중용의 길을 걷는 것을 말한다.

<중용>에서는 "희로애락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나타나되 절도에 맞음을 화(和)라 한다"고 설한다. 또한 중을 대도, 화를 달도라고 하며, "중과 화에 이르면 천지가 자리 잡히며 만물이 육성된다"고 한다. 나아가 순자는 희로애락의 정(情)이 발현되지 않은 것을 성(性)이라 하고, 편벽되고 치우친 바가 없으면 중, 드러나 정도에 맞는 것을 정의 바름, 그리고 사리에 어그러져 온당하지 않음이 없는 상태를 화라고 구체적으로 설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심에서 발현된 중용의 도는 오늘날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를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당대의 사회적 정의를 고민하지 않은 동서양의 성현이나 철학자는 거의 없다. 정의의 내적 표준인 중용 또는 중도는 그 속에 이미 사회적 정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일상의 수행인 무시선법의 일심과 정의의 관계로 집약된다. 사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 다수의 동의로 제정된 법만 잘 운영해도 사회적 정의는 완성될 수 있다. 법률은 이야말로 정의로 나아가는 기반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진리적 정의를 목표로 하되, 이를 보통사람이 소화하기 쉬운 실천 가능한 도덕이나 윤리가 요청된다. 즉 성현의 깨달음을 정의의 표본으로 삼아 누구에게도 권리와 의무가 편벽됨이 없는 사회적 정의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다.

사회적 정의의 핵심은 평등과 자유다.

무지와 무명에 대항해 이를 확장해온 과정이 인류의 역사다. 인간의 보편적 권리와 인류 전체의 온전한 삶을 위해 투쟁해온 독립운동,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평화운동, 환경운동 등에 헌신한 선각자들은 역사에서 볼 때 사회적 중도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평등과 자유의 사회적 가치는 영원하다. 평등은 모든 이들을 부처로 떠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가치이며, 자유는 모든 이들이 부처로 살아갈 환경을 만드는 가치다. 이러한 완전한 사회 건설을 방해하는 모든 조건들이 불의다. 누구든 자유와 평등의 두 날개로 비상할 수 있다면 사회적 정의는 확립된 것이다. 

정의의 궁극적 세계는 모두가 옳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 일부의 이익이 아닌 전체의 이익이 되는 것, 그리고 마침내 인류가 한 가족이 되어 유대 속에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30계문, 솔성요론, 법위등급은 사회적 정의를 현실화하는 데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동력이다. 결국 고통이 소멸된 불토낙원으로 가기 위한 신앙과 수행의 행위 하나하나가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원광대학교

[2018년 12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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