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문답/ 무시선법
새삶회·시민선방 최희공 원무 2

〈정전〉 원문대로 응용하고, 실지 활용하는 사실적 공부로
일어나는 번뇌에 괘념치 말고, 스승의 가르침에 법맥을 대라
천상락으로 오욕을 놓겠다는 마음도 분별, 선악 초월이 극락

-<정산종사법어> 경의편 65장에서는 4가지 단계로 공부법을 밝히셨다. 무시선법과의 관계는
'선은 원래 분별 주착이 없는 성품을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이다'라고 했다. 그 성품 자리를 알아서 그대로 진공 묘유가 돼 밖으로 경계를 대하되 부동하기는 태산과 같이 하고, 안으로 청정하기는 허공과 같이 하여 동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으면 바로 선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왜 4단계 공부법을 밝히셨는가.

사람들이 진공 묘유의 선이 다 바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선의 원리를 알았다 하더라도 몸과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다. 업력이 꽉 차서 따라 가지 않기 때문에 이 같은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해서 집심(執心)·관심(觀心)·무심(無心)·능심(能心)의 무시선법 4단계를 밝혀줬다. 이것은 부처님의 대자대비이다. 이 법이 없었으면 무시선 공부하는 사람은 몇 사람 안 될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나는 무시선 공부를 못할 것이다" 하고 포기하게 될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무시선법 4단계 공부를 밝혀서 우리들이 선에 점차 계합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그러나 이 무시선법 4단계는 꼭 순서 따라 밟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환경과 심경에 따라 집심 공부가 필요할 때도 있고 관심 공부가 필요할 때도 있어서 때를 따라 택법(擇法) 할 수 있는 것이다. 

-4단계의 첫 공부인 집심·관심의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선 공부를 처음 하는 사람은 집심 공부를 해야 한다. 말 안 듣는 소를 길들이려면 소의 고삐를 꽉 잡고 그 고삐를 놓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집심 공부이다. 마음의 고삐를 꽉 잡고 안 놓아야 한다. 예를 들어 어디 여행을 다녀와서 마음이 계속 들떠 있으면 그때는 그 마음을 꽉 붙들고 해야 할 일이나 공부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들뜬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것이 집심공부이다. 이때 중요한 것이 고삐를 놓지 않는 것이다. 그 고삐는 스승님의 법줄이다. 이 법줄을 절대로 놓지 않아야 한다. 

또한 <정전> 원문에는 '아무리 욕심나는 경계를 대할지라도 끝까지 싸우는 정신을 놓지 아니하고 힘써 행하라'고 되어 있다. 정전 원문을 외워서 원문대로 실습해야 그 효과가 빠르다. 

두 번째는 관심공부이다. 스승님의 법줄에 의지해 집심 공부가 잘 되면 마음의 고삐를 놓고 마음이 다른 곳으로 흐르는지 안 흐르는지 관찰하라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본다고 붙잡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놓아서 자유롭게 하되 그 행동을 살펴서 위험한 곳으로 가려고 하면 그때 바로 붙들면 되는 것과 같다. <정전> 원문에는 '경계를 대할 때마다 공부할 때가 돌아온 것을 염두에 잊지 말고 끌리고 안 끌리는 대중만 잡아 갈지니라'고 돼 있다.

여기서 '대중'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중요하다. 사전에 보면 대중은 '대략적으로 헤아려 안다'는 뜻으로 돼 있다. 대중을 잡다가 욕심 경계에 끌려간다 싶으면 바로 '끝까지 싸우는 정신'을 다시 챙겨 힘써 행하는 것이다. 관심공부가 능숙해지면 '내가 끌리려 하는 구나' 하고 알아차려 대중 잡으면 그 끌리는 마음이 스스로 사라진다. 관심공부를 관념으로만 알지 말고 실지 실습해 봐야 한다.

- 무심과 능심이란 무엇인가
자유롭게 두었다가 끌리려는 조짐이 있을 때 알아차리는 공부가 관심공부라면, 무심공부는 한발 더 나아간다. 심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경계에 놓아 맡겨보는 것이다. 경계에 놓아 맡겨보되 대중심을 가지고 경계에 놓아 맡겨보는 것이다. 마음이 경계에 동하면 아직 도심이 미숙한 것이요, 동하지 않으면 도심이 익어가는 증거인 줄 아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대중심을 가지고 살피는 공부 역시 대중심이라는 심력을 쓰는 것이라, 자연히 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원문에는 '놓아도 동하지 아니하여야 길이 잘든 것이니라'라고 돼 있다. 완전히 심력을 놓을 수 있을 때까지 길들여야 한다.

놓아도 끌리지 않게 되어 시끄러운데 처해도 요란하지 아니하고, 또는 욕심 경계를 대하여도 동하지 않아야 이것이 능심의 단계이다. 이때는 길 잘든 마음소를 이용하여 정의를 실천하고 세상을 위해 바르게 사용하되 경계가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항상 마음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며 은혜를 생산한다. 이렇게 정의를 실천하면서 교법의 대의가 드러나는 선 공부가 되어야 한다.

<금강경>에서도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했다. 천만 경계에 응하여도 주착하지 않으며, 물들고 썩지 않고 그 마음을 내면 자유자재가 돼 진공묘유의 용심법이 나타나는 것이다. 진공묘유의 용심법은 원래 분별 주착이 없는 진공으로 체를 삼고 영육쌍전, 동정일여, 이사병행 등의 교법 대의가 남김없이 드러나도록 마음을 작용하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정전> 원문대로 활용해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선을 오래오래 계속하여 모든 번뇌를 끊고 마음의 자유를 얻은 즉 철주의 중심이 되고 석벽의 외면이 된다'고 했다. 이 말에 공부가 어렵게 느껴진다. 이 단계까지 계속 선을 해야 된다는 것인가
선(禪)이라는 것을 좌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진다. 여기서 선은 삼학 병진의 무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부를 하여야 철주의 중심이 되고 석벽의 외면이 되는 부동심을 얻는 선에 들 수 있는가? 이 공부는 신분의성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첫 번째로써 신(信), 즉 진리와 법과 스승과 회상과 둘 아닌 큰 신을 세워야 한다. 

예를 들자면 나는 대산 종사를 뵙고 우리 스승님 이외에 더 큰 스승이 없고 우리 법 이외에 더 큰 법이 없고 우리 회상 이외에 더 큰 회상이 없다는 큰 신이 섰다. 큰 신이 세워지면 아무리 큰 경계가 몰아쳐도 철주의 중심처럼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한다. 내가 대학원 다닐 때에 전무출신을 서원했는데, 대산종사는 원불교 경제 기반 확립을 위한 대공장 설립을 염두에 두고 "희공이는 공학 공부를 계속하라"고 말씀했다.

그 말씀을 듣고 나는 교무가 되려는 생각도 잊고, 진리를 오득하려는 생각도 잊고, 수행의 힘을 얻으려는 생각도 잊고, 오직 "스승님 염원을 이뤄 드려야겠다"는 한 마음으로 수십 년을 공학을 하고 제자를 기르는 데 정성을 다했다. 이때 마음이 어디에도 흔들리지 아니했다. 마음이 요란해도 요란한 것에 관계하지 않았다. 탐·진·치가 일어나도 '일어났지 내가 안 끌려가면 되지 무슨 상관이냐'며 그렇게 부동한 것이다. 욕심이 없어서 부동한 게 아니라, 천만번뇌가 일어나도 그것에 괘념치 않는 것으로 부동한 것이다. 일체 부동했다. 오직 스승님을 믿고 가르침대로만 하면 된다.

이렇게 마음이 정(定)하면 부동이 체를 잡는 것이다, 일단 마음이 정하여 자리를 잡은 후 고요하게 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면 되는 것이다. 석벽의 외면이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스승님을 다 믿고 다 바치고 죽기로써 공부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죽어서 법을 살리자. 내가 죽어서 회상을 살리자 내가 죽어서 세상을 살리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정해지고 그 마음으로 지성으로 선 공부를 하면 경계에 부동하는 것이다. 내가 죽어서 공(公)을 위하려는 전무출신 거진출진 정신을 가지고 선정을 닦아야지 부동이 쉽게 되는 것이지 그 정신이 없이 선정만으로 부동하려 하면 어렵다. 

-'진세에 처하되 백천 삼매를 얻는다'고 했다. 오욕 경계에 끌리지 않으려면 인간락보다 선정을 통한 천상락을 얻는 것이 해탈 공부가 될 수 있지 않는가
분별 주착이 없다는 것은 인간락(人間樂)과 천상락(天上樂)을 다 놓는다는 것이다. 이를 극락이라 한다. 선악과 고락을 초월해야 극락이다. 고락을 초월해서 새 세계를 개척하는 전무출신 거진출진 정신은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생각하지 않고 고락을 초월하는 정신이다. 그러면 괴로움과 즐거움의 구별이 없다. 이것이 극락이며, 백천 삼매를 얻는 길이다. 

선악과 염정의 분별을 놓을 때 진흙 속에 들어가서도 물들지 않는 것이지, 깨끗하려고만 하면 물듦이 생기는 것이다. 천상락이라 해도 얽매이면 금방 물든다. 이것도 저것도 다 놓고 진리와 스승과 법과 회상을 위해 다 바쳐야 되는 것이다. 일체를 초월한 자리에서 선을 해야 진정한 선이 된다. 깨끗한 것을 찾아 천상락을 얻으려는 마음은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구별하는 분별심인 것이다. 

[2018년 12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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