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최봉은 원무] 정산종사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과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을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성품이 고요한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나 움직인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한 것이니 성품의 본체 자리를 그대로 체받아서 행할 때에는 선으로 나타나야 하므로 계선설(繼善說)이라고 하여야 옳을 것이다." (<한울안한이치> 제1편 법문과일화 3.일원의진리 90)

우리는 보통 성품을 심지(心地), 즉 마음 밭으로 이해하여 우리가 악을 심으면 악이 나오고 선을 심으면 선이 나온다고 한다. 이런 생각이 틀린 건 아니지만 '성품(體)이 발한 상태가 심는 마음(用)'이라는 일원론적 관점에서 보면 앞의 논리는 성품과 마음을 이분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마음 씨앗을 심는 우리가 따로 있고 씨앗을 심는 밭인 성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성품이 동하여 심는 마음이 되고 이에 따라 육근이 작용됨을 알아야 한다. 성품의 용이 육근작용이고 육근작용의 체가 곧 성품이다. 그리하여 '성품의 본체 자리를 그대로 체받아서 행할 때에는 선으로 나타나야 하므로 계선설이라 해야 옳다'는 정산종사의 계선설 법문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무아(無我)이기에 나 아님이 없는 지경이 곧 법신불 자리이자, 성품의 본체자리다. 따라서 우리가 육근작용을 하는 것은 곧 법신불의 용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육근을 작용할 때 성품의 본체 자리를 그대로 체받아 행하는 것이 선이 된다. 성품 그 자체에는 본래 하나로써 상대가 없으며, 또 상대가 없기 때문에 나를 위해 남을 해한다는 일도 있을 수 없다.

성품의 본체자리인 법신불 자리는 공적영지(空寂靈知)다. 공적영지는 한자 그대로 '고요한 가운데 신령스럽게 안다'는 뜻이다. 우리 회상의 전통 방식으로 말하자면 '두렷하고 고요하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정산종사는 "두렷하다 함은 우리의 자성이 원래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자리임을 이름이요, 고요하다 함은 우리의 자성이 본래 요란하지 아니하고 번뇌가 공한 자리임을 이름이니…." (<정산종사법어> 세전 9.열반에 대하여)라고 했다.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며 요란하지 아니하고 번뇌가 공하다' 했으니 성품의 체가 경계를 대하여 작용을 할 때(用), 응당 원만구족하게 다 보고(다 알고), 지공무사하게 바르게 보아(바르게 알아) 사를 떠나 지극히 공변되게 안이비설신의를 작용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악(惡)은 왜 나오는 것인가. 다시 정산종사의 법문을 인거해 보자면, "우리의 자성은 원래 공적영지하고 영지불매(靈知不昧)하여 무애자재한 반야지가 천연적으로 갊아있어 제법개공지처(諸法皆空之處)에 진공묘유의 자리이니라. 그러나 중생들은 다겁을 내왕하면서 물욕에 방치하여 마치 밝은 달을 검은 구름으로 뒤덮듯이 온갖 욕심을 따라 어리석은 중생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나니라"고 했다.

또 총부학원의 학인들이 <수심결> '세존이 보관일체중생(普觀一切衆生)하니 구유여래지혜덕상(具有如來智慧德相)이라시며, 일체 중생의 종종환화(種種幻化)가 여래의 원광묘심(如來圓光妙心)이라'는 구절을 바탕으로 '종종환화가 지혜덕상에 갊아 있다가 나오게 되는가'란 주제로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정산종사는 이에 대해 "우리가 좌선을 할 때에 모든 분별을 여의고 온전한 진공에 멈춰 있을 때에는 선악염정을 찾아볼 수 없으나 한 생각이 발함에 따라 선악염정의 분별이 있게 되나니, 그렇다면 이 선악염정의 분별은 어디서 나오게 되는가. 그것은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영지가 있기 때문이니, 그 영지가 소소히 경계를 비침에 따라 습관과 업력에 의해서 종종의 분별망상이 나타나나니라. 그러나 부처님은 영지로써 경계를 소소영령하게 비추시되 항상 자성을 회광반조 하시는지라, 그 영지가 외경(外境)에 쏠리지 아니하고 오직 청정한 지혜만이 나타나나니라"고 설하시며 "이와 같이 본래의 성품은 똑같지마는 습관과 업력에 따라서 다르게 되므로 부처와 중생의 차이가 있나니, 부처님은 회광반조하여 경계를 대하되 외경에 주하여 분별심이 생하지 아니하고 중생은 경계를 대하되 외경에 주하여 분별심이 생기게 되나니라"(<정산종사법설> 제8편 편편교리)고 설법했다. 

즉 경계를 대하매 부처님은 회광반조하여 성품의 본체자리를 그대로 체받아 분별망상없이 행하므로 계선(繼善)이 되며, 중생은 습관과 업력에 의한 분별망상에만 끌리고 가려서 시비를 행하므로 악(惡)을 심는 것이다. 가리운 줄을 아는 것이 견성이요, 가리움을 걷어내는 것이 양성이며, 가리움 없이 사는 삶이 솔성이다.

/남부민교당

[2018년 12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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