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생활 속에서 삼매를 경험한다면, 그 삶은 경전을 써내려 가는 행위가 된다. 삶이 곧 경전이 된다. 특히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그 경지를 드러내 보여준다. 파리의 오르셰 미술관에 소장된 밀레의 '만종'을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가끔 음악방송을 통해 나오는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들으며 눈물 흘리기도 한다. 필자 또한 아침 출퇴근 시간에 차를 몰다가 바이올린 선율에 눈물을 훔친 적이 있다. 왜 우리는 예술 작품 속에서 감동을 얻는가.

이유는 삶의 본질이 거기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감수성 풍부한 사람들은 예술 속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여의 세계로 빠져드는 무한한 희열을 느낀다. 눈으로 귀로 접하는 예술은 삶의 진실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우리 삶은 하나로 만나는 흐르는 강물이다. 현대인은 분주함 속에서 길을 잃고 뼈저린 고독을 느낀다. 애초에 우주 전체가 한 몸임을 알면서도 모든 생명이 의지해 있는 대해(大海)의 고향을 상실하고 방황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진실을 드러낸 예술을 통해 그 고향을 발견한다.

미술과 음악은 그 진실을 그대로 우리의 감성 속에 전달한다. 시시각각 변해 가는 무상함 속의 영원성이 미술작품 속에 숨어 있다. 인상파 화가들은 들녘에 나가 빛이 펼치는 세상의 파노라마를 관찰한다. 몇날 며칠을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빛이 온 세계를 완전하게 비춰주는 그 순간 세계와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 순간 빛이 명령한 대로 화폭 위에서 손을 움직인다. 손은 '지금 이 순간'을 그대로 옮겨온다. 화가는 죽고 그 작품은 남아 있지만, 그가 봤던 그 영원성은 시간이 흘러도 우리 모두의 뇌리에 그대로 전달된다. 미술작품을 보는 순간 전율이 이는 것은 한 방울의 물이 마르지 않기 위해 대해장강에 몸을 던진 순간을 느끼기 때문이다. 

음악은 하나의 악보에 삶이 투영되어 있다. 연주는 처음과 끝이 있다. 우리 인생 또한 태어남과 죽음이 있다. 비록 악보는 하나이지만, 그 연주는 지휘자와 연주자들에 의해 다르게 해석되어 연주된다. 물론 대 지휘자는 우리를 은혜로 보호하는 법신의 부처다. 조물주라 해도 좋고 신이라 해도 좋다. 생명은 다 같은 하나이지만 자신의 업(業, karma)에 의해 다양한 삶이 연주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하나의 악기다. 작은 법신불인 나는 나를 지휘하는 지휘자 겸 연주자다. 가족, 직장, 마을은 다양한 악기로 조화를 이루는 더할 나위없는 연주장이다. 세계는 우주적 하모니를 내는 거대한 오케스트라다.

무시선은 이처럼 나의 삶을 하나의 예술이 되게 하는 원리다. 내가 하는 일이 길거리를 쓸고 닦는 청소부이든, 한 나라를 움직이는 공무원이든, 세계를 누비는 사업가이든, 길거리의 포장마차 주인이든 나는 나의 주인공이다. 나는 순간순간을 떠받쳐주는 영원한 진여의 세계를 품고 있다. 내 삶의 지휘자로서 나는 일진법계를 구성하는 오케스트라의 단원이다. 이러한 마음의 세계를 포착하고 확보한다면, 곧 무념, 무착, 무주의 경지를 사는 것이다.

진공은 과거와 미래에 매이지 않는 현재의 이 순간을 말하며, 묘유는 그 순간 피어난 완전한 나의 현존재를 말한다. 우리는 이처럼 부처로서 모든 생명과 더불어 우주를 조화롭게 장엄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원광대학교

[2018년 12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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