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여러 사람을 대하다 보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심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을 대하면 내가 내린 판단과 차별의 눈으로 보고, 말하고, 상대하게 된다. 그런데 부처님은 잘난 이와 못난 이, 예쁜 사람 미운 사람 등 모든 이들을 평등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오로지 중생을 제도해 부처 만들려는 염원으로 대할 뿐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언제나 신심 있고 선량한 제자가 조그마한 허물을 보이면 꾸중을 더했다. 그리고 신심 없고 착하지 못한 제자가 큰 잘못을 저지르면 꾸중을 적게 하고, 혹 작은 선행이라도 했을 경우에는 칭찬을 많이 했다. 한 제자가 그 이유를 여쭙자, 대종사 이렇게 대답한다. "열 가지 잘하는 가운데 한 가지 잘못하는 사람은 그 한 가지까지도 고치게 하며 결함 없는 정금미옥을 만들기 위함이요, 열 가지 잘못하는 가운데 한 가지라도 잘 하는 사람은 그 하나일지라도 착한 싹을 키워주기 위함이니라."

보통 사람이라면, 모든 면에서 모범적으로 잘하고 있는 아랫사람이 작은 잘못을 저지르면, 그냥 눈감아 주거나, 그것조차 예쁘게 보아 넘기기가 쉬울 듯하다. 반면에 매사에 성품도 좋지 않고, 두루 허물이 많은 아랫사람이 큰 잘못을 보이면,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너는 어떻게 매사에…" 이런 생각이나 말이 불쑥 앞서기가 쉬울 것이다. 

정견(正見), 바르게 본다는 것은 나의 분별 주착심에 떨어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줄 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은 나름 일리는 있지만, 진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류가 있다. 하나, 둘, 셋, 넷… 아홉 가지를 봤다 해서, 나머지 열번째도 같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면, 비록 열번째에 다른 것이 나왔어도, 나의 고정관념이 오버랩 되어 이전 아홉개와 같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한번 밉게 보인 사람은 무엇을 해도 밉게 보이고, 한번 내 눈에  예뻐 보인 사람은 어지간한 실수도 그저 너그럽게만 보아진다면, 이는 정견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홉 가지 잘못하는 사람이 한 가지를 잘했을 때, 그 점을 인정해주고 격려해줄 수 있으며, 아홉 가지 잘하는 사람이 한 가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것마저 다듬어 불보살의 인격으로 가르치고 싶은 것이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심법이다. 

우리가 이런 부처님의 심법을 닮아가고자 한다면,  혼낼  때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 '항상', '한번도'라는 말이다. 직장 상사나 부모에게서든, 배우자에게서든, "넌 항상 그래", "한번도 제대로 한 적을 못봤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떠했는지 기억이 나는가. 그 두 단어는 상대로 하여금 억울함과 섭섭함, 반감만 일으키며, 상대의 변화 가능성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진리에 반하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듣기 싫어하는 그 말을 나는 누군가에게 무심코 하지 않았던가. 설령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런 생각과 시선으로 누군가를 바라보지는 않았던가. 이 두 단어를 생각만으로도 품지 않도록 조심해도 소태산 대종사의 흉내를 조금은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미주총부법인

[2018년 12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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