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신도경 원로교무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어쩌다 한번씩 썼던 일기일지라도 훗날 다시 꺼내 들었을 때는, 당시 일상에서 겪었던 평범함들이 고스란히 역사로 바껴 있을 것이다. 흔하디 흔했던 그 당시 삶과 생활은 지금 다시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이제는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들이 되어버렸으니까 말이다. 어느 선진의 이야기가 역사가 아니겠느냐마는 이번에 만난 익산 신도경(71·益山 辛道暻) 원로교무의 이야기에는 당시 평범했던 전무출신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마을 잔치, 그 이상의 4축2재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태어난 그는 영산성지 도량에서 크고 자랐다. 팔산 김광선 선진의 사모였던 심타원 신정랑 정토가 고모할머니였고, 김문택 원로교무 사모였던 신영순 정토가 그의 셋째 누나다.

그가 어릴 때 영산에서 신정절, 대각개교절 같은 큰 행사가 열리면 길룡리는 말할 것도 없고, 장산리·논산리·천정리에서 마을 사람들이 전부 모였다. 사람들이 모이면 큰 가마솥에 귀했던 쌀밥을 가득 지어서 오는 분들마다 대접했다. 아이들은 더 얻어 먹으려 몰려들었고, 그렇게 없던 시절에 영산에서 열리는 행사는 마을잔치 그 이상이었다. 그도 일찍이 회상과 인연이 깊었지만, 철없던 어린시절 뜨내기처럼 왕래만하다가 18세 무렵 목타원 황주남 교무(1916~1982)의 연원으로 원기50년 입교한다.

영산에서 모신 어른들
원기54년 영산출장소에서 간사근무를 시작하게 된 그는 형산 김홍철 교무, 성산 성정철 교무, 낭산 이중화 교무, 향산 안이정 교무를 모시며 일을 배웠다. 그는 어른들을 모시며 한마디씩 받들었던 이야기가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그때 어른들이 전부 조실에서 주무셨거든. 내가 간사생활 할 때 아침, 저녁으로 조실에 불을 때 드려야 주무실 수 있었어. 생활지도는 주로 성산 법사님에게 받았는데 '너는 천성 도인 기질을 타고났으니까 나가지 말고 원불교에서 공부 열심히 해라'고 하셨지. 낭산 법사님도 다른 분들 있는 앞에서 '자가 무슨 복이 있어서 여기 산다요' 하시곤 했지."

이듬해 그는 군입대를 했고, 베트남전쟁까지 자원했다. 이후 원기59년 영산선원에 정식으로 입학해 원기63년 수학과정을 모두 마치고 졸업했다.

향산 종사를 모시며
그의 첫 발령지는 전주보화당이었다. 예산 이철행 교무(1928~2007)가 당시 전주보화당을 운영했는데 인사발령을 앞두고 대산종법사 훈증시간이 끝나자 그 자리에서 "너는 전주보화당으로 와야 한다"며 콕 집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그곳 생활은 고됐다. 빈량이라는 약재를 썰다가 손을 상하기 일쑤였고, 종일 앉아서 작두질만 하는 생활도 기질에 맞지 않았다.

"다른 애들은 다 잘하는데 아무리 정성스럽게 한다고 해도 나는 잘 안돼. 6개월 살다가 결국 말씀드리고 나왔지."

그는 이듬해 중앙훈련원(현재 원불교대학원대학교)으로 이동했다. 당시 중앙훈련원에는 형산 김홍철 원장, 예타원 전이창 부원장이 주재했다. 향산 안이정 교무가 훈련을 주관했고, 이종진 교무와 이성택 교무가 근무했다. 그는 함께 근무하게 된 안이정 교무를 아버지처럼 모시며 따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안이정 교무 밑에서 살던 교무들이 오래 못 살고 다 나가버렸다.

"내가 향산 종사님을 아버지처럼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계속 말씀 드려 왔지. 조회때 직원들이 훈련 프로그램 안을 다 만들어 놓으면 당신이 저녁에 와서 다시 전부 수정해 버리셔. 회의를 통해 하기로 했으면 회의대로 해야 하는데…. 이종진 선생이나 이성택 선생도 당시 훈련에 일가견이 있어서 훈련원으로 모셔온 건데, 훈련에 대한 변화를 생각했던 당신들 뜻대로 못했지."

향산 종사는 철저하게 소태산 대종사가 가르쳤던 원안을 고수했다. 그래서 훈련 초입자들에게는 향산 종사의 강의가 좋았지만 같은 내용이 반복되다 보니 조금 아는 사람들은 싫증났던 터라 훈련에 대한 무언의 변화가 필요했던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아버지처럼 모시던 향산 종사를 오래 모시고 싶었지만, 식품부 인사가 급히 필요하다는 요청에 원기72년 원창으로 이동하게 된다.

어려운 기관에서의 삶
총부의 어려운 살림을 일으키기 위해 설립했던 식품부는 메주부터 참기름, 들기름, 김치 등 안 하는 게 없었다. 그러나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그는 매일 창고에서 하루종일 연탄을 갈고, 김치 운반하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그러다 어깨가 늘어져 시술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 원기77년 이리자선원에서 살게된다.

"식품부에서 몸이 상하고 나서 교당에서 교화해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세웠지. 그런데 서성범 선생이 삼정원에 올 사람이 없어 나를 데리러 온 거야. 교화하겠다고 말씀드리니 '자네 교화한다고 했제. 원생들 법당 교무하면서 교화해 보소'라고."

그렇게 2년 법당 교무에 사무실 총무까지 5년을 산 후 교당 교화를 나가려던 찰나 수계농원 교무가 나가버리는 바람에 이번에는 수계농원으로 발령받았다.

"허허벌판에 간사도 없고 막막했지. 그래서 삼정원을 찾아 원생들을 고용했어. 부모님들에게 달마다 5~10만원씩 드리면서 없는 인력이라도 보충했지. 얼마전까지 같이 허물없이 생활했던 터라 서로 믿고 의지했지."

꿈꿔왔던 교당 교화
원기87년 그는 꿈꿨던 교화 현장인 신석교당으로 발령받았다. 그리고 원기96년 이평교당에 발령받았다.

"그렇게 기관에 많이 살아왔는데, 왜 교당으로 가려고 마음먹었는지 생각해보니 중앙훈련원 생활하면서 배우고 녹음했던 훈련 프로그램을 교도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어. 전부 내 소리는 아니더라도 하나하나 다시 공부하면서 발령받은 교당에서 열심히 가르치려고 했지."

그런 그에게 교당 교화는 하나의 아쉬움이자 동시에 보람이기도 했다.

"신석교당에서는 7년을 살았는데 조금만 더 있었으면 25명에서 30명까지 채울 것 같았는데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지. 이평교당에는 할머니들이 많이 계셔서 유지비는 못 내시더라도 성지순례 시켜 드리면 그렇게 좋아들 하셨어. 순교도 많이 다녔지. 노인들 혼자 계시면 집안에 손봐드릴 것 찾아서 해드리면 또 밥해 주신다고 해. 다들 혼자 계셔서 대충 라면 드시거든. 그러면 나는 '라면 있으면 좋아요' 말씀 드려. 그분들 드시는 대로 같이 먹고, 일하시는 분 있으면 같이 들어가서 일하고 그렇게 살았어." 

그는 원기101년 퇴임했다.

교화 그리고 후진 이야기
그는 교화에 대해 이렇게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할 때 교화라는 것은 소태산 대종사님 법을 전달하는 것이지. 말로써 전달하기도 하지만 실생활에서 나온 체험으로 말씀 드려야지. 본인이 실행 안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 드리면 안돼. 교도들이 더 잘 알아. 내가 얼마만큼 진솔하게 교당생활하면서, 교무생활하면서 재색명리에 흔들리지 않고 있는지 다 아시거든."

그는 후진들에 대한 정책에 대해서도 선배로서 한마디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위에 큰 어르신들이 많이 계셨잖아. 그래서 어른들 사시는 모습, 하시는 말씀 받들면서 별 탈 없이 컸지. 그런데 이제는 세대가 달라서 우리 스스로 전무출신 배출시킬 요소를 갖춰야 해. 전무출신 나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낼 수 있도록.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게 급여도 일정 수준을 맞춰주면서 가족들에게 미안하지 않도록 하는 배려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가 꺼내들었던 일상적이고도 평범했던 이야기들은 후진들에게 이제 모두 전설이 됐다. 그러나 그가 후진을 위해 걱정하는 이야기는 현실이다. 오래전 썼던 일기는 역사가 될지라도 그 일기는 지금도 쓰여지고 있으니까.

[2018년 12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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