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최봉은 원무] 열반이라 함은 우리 말로는 두렷하고 고요하다는 뜻인 바, 두렷하다 함은 우리의 자성이 원래 원만 구족하고 지공 무사한 자리임을 이름이요, 고요하다 함은 우리의 자성이 본래 요란하지 아니하고 번뇌가 공한 자리임을 이름이니, 사람이 이 자성의 도를 깨쳐서 자성의 원래를 회복함을 열반이라 하며, 그 자리를 단련하여 언제나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고 극락을 수용함을 일러 열반락을 얻었다 하나니라.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열반의 참 낙을 얻어서 언제나 한결 같이 원적을 수용하는 이는 극히 적으므로 불가에서 형식상 사람이 죽는 것을 열반이라 하여 왔으나, 같은 열반 가운데도 근본 진리를 잘 체득하여 실지로 열반에 드는 이도 있고 색신은 비록 열반하였으되 망연(妄緣)은 길이 쉬지 아니하여 참다운 열반을 얻지 못하는 이가 많으므로, 공부하는 이들이 평소부터 이 열반의 도를 잘 단련하여 생전에도 열반락을 잘 수용하는 동시에 색신이 열반하는 때를 당하여 참다운 열반을 얻자는 것이니라.
 - <정산종사법어> 제1부 세전 제9장 열반 1. 열반에대하여

우리가 공부를 하는 목적은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의 이치 속에서 참 열반을 얻고 또한 일체중생이 참 열반을 얻도록 그 길을 인도하기 위함에 있다. 공부인들 중에도 <정전> 정신수양의 요지의 '두렷하고 고요한 자리'를 개념잡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여기 이렇게 확연하게 밝혀 줬으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두렷하다 함은 '우리의 자성자리가 원래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자리를 이른다' 했고, 고요하다 함은 '우리의 자성이 본래 요란하지 아니하고 번뇌가 공한 자리임을 이른다' 했다. 우리의 자성은 요정(擾靜)이 없는 자리로써 '요란함'도 '요란하지 않음'도 없는 자리임을 가르쳐 왔으나, 배우는 입장에서는 적지않은 혼란이 있어 왔다. 

'요란하지 않은 자리'라 함은 요정을 뛰어 넘었으되 '요란하지 않은 자리'이다. 개념을 좀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대산종사법어> 거래편47장을 인거해 보면 '선하되 선악을 초월한 지선(至善)으로 선하고, 즐기되 고락을 초월한 극락(極樂)으로 즐기고, 마음을 쓰되 유무를 초월한 묘유(妙有)로 마음을 쓰고, 임하되 생사를 초월한 열반(涅槃)으로 임하시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의 자성자리는 본래 요란하지 아니하고 번뇌가 공한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공부 목적은 이 자리를 단련해 언제나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고 극락을 수용함에 있으며, 이를 일체중생에게 깨우쳐 실행케 함에 있다. 이 자리가 소태산 대종사가 천명한 광대무량한 낙원세계이며, 일체중생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는 삶이다.

비고(空) 없다(無)는 것은 오온(五縕)을 두고 한 말이지 열반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더욱이 적멸을 열반이라 지칭한 것도 아니다. 허무와 적멸도 없고, 없다는 말도 없다. 거듭 강조하건대 있음(有)만 없는 것이 아니고 없음(無)도 없다. 유무초월이어서 불생불멸이니, 이 지경이 소태산 대종사가 밝힌 '영천영지영보장생하여 만세멸도상독로한 자리'다. 

또 석가모니 부처가 말씀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자리며, 대산종사가 말씀한 무아무불아(無我無不我)의 자리이다.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학팔조는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 가운데 세세생생이란 개념과 더불어 광대무량한 낙원세계로 그 빛을 발한다. 그리하여 거래각도무궁화 보보일체대성경인 것이다. 현재 교단의 풍토는 멈춰 생각하여 행하는 유념, 수행을 반복하는 훈련과 더불어 '나는 마음'과 '내는 마음'으로 마음공부의 대체를 잡고 있다. 

공부는 근기 따라 하는 것이지만, 소태산 대종사의 법은 '수상문과 자성문을 중간잡아 놓으셨다' 했으니 두 가지 방법을 다 열어놓은 격이라 하겠다. 

무시선법에서 인용한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에서의 생(生)의 본래적 의미를 되새겨 본다. 낼 생(生)으로 말하면 '응하여도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날 생(生)으로 말하면 '응하여도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가 되는데, 전자가 수상문정혜라면 후자는 자성문정혜이다.

'공부하는 이들이 평소부터 이 열반의 도를 잘 단련하여 생전에도 열반락을 잘 수용하는 동시에 색신이 열반하는 때를 당하여 참다운 열반을 얻자는 것이니라'는 마지막 단락의 가르침은 정산종사 법문의 대미를 장식하는 법문이 아닐 수 없다.

/남부민교당

[2018년 12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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