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참회야말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간을 끌어올리는 길이다. 사회에서 죄는 미워할지라도 인간을 미워하지 말라고 하는 말에는 진리가 숨어 있다. 죄는 잘못된 행위를 말한다. 죄(罪)라는 한자는 잘못을 저질러 그물에 걸렸다는 뜻이다.

<명심보감>에서는 "오이를 심으면 오이가 나기 마련이니, 하늘의 법망이 넓고 넓어서 성긴 것 같아도 새지 아니한다"라는 말씀은 이러한 인간의 죄에 대한 인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 마음속에는 자신의 업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마음과 그 마음이 잘못되었음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양심이 항상 대립해 있다. 성현들은 그 양심을 인과의 원리와 하늘의 식으로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그래서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밝은 곳으로 가기를 꺼려하거나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면 몸을 움찔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회는 지은 죄를 고백하고 원래의 마음을 회복하는 일이다. 기독교 또한 회개의 의미를, 자신을 하느님께 온통 맡기고 죄를 뉘우치며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한다. 동서양이 그 근본은 같다.      

혜능대사는 〈육조단경〉에서 "참(懺)이란 어리석고 교만하며, 허망하게 시기 질투한 죄를 뉘우쳐 지난날에 지은 악업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悔)란 지금부터 저지르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그 죄가 되는 것을 미리 깨달아 끊어 없애고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고 설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앞으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실천하는 일인 것이다. 

참회는 변화 가능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마음은 끊임없이 요동친다. 안이비설신의 모든 육근은 색성향미촉법의 육경에 상응해 살아간다. 대표 격인 신구의(身口意)가 미혹에 빠져 바른 판단을 그르칠 수도 있다. 모든 경계로부터 마음의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하는 한 누구든 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다. 잠깐 딴 눈 파는 사이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져 다른 곳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러니 다시 죄를 짓기 전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면 해결될 일이다. 

그런데 관성이라는 것이 있어 참회가 쉽지는 않다. 이를 습 혹은 습관이라고 한다. 대산종사는 취사에 있어 "공부인은 늘 습관의 굴을 뚫어 심감(心鑑·마음의 거울)을 밝혀서 바른 처사를 할 것이다"라고 설파한다. 참회를 하는 것은 이 습관을 정법에 비추어 좋은 습관으로 바꾸는 것이다. 또한 죄업으로 고통 받는 자신을 백일하에 드러내어 보다 넓은 세계로 마음을 확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참괴(慙愧)는 이것을 잘 나타낸다. 참은 양심을 스스로 뉘우치는 것이며, 괴는 진리와 대중에게 부끄러움을 과감히 드러내어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근묵자흑처럼 죄업은 다른 죄업을 짓는 일에 연쇄반응을 한다. 업의 굴레인 습관과 그 연결고리를 끊어낼 때는 몸의 오래된 종기를 도려내는 것과 같은 아픔이 있지만, 심신은 상쾌해지고 더욱 건강해지는 것과 같다. 그러니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도에 발심한 자는 모름지기 공부의 기반인 마음의 기틀을 확립하기 위해서라도 과거의 잘못을 진실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마차에 무거운 짐이 실려 있으면, 그 무게만큼 끄는 힘도 더 드는 이치와 같다. 과거의 죄를 훌훌 털어내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양심의 밝음과 진리의 위력을 빌려 용기를 내야 한다.  

/원광대학교

[2018년 12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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