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성 교무

[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훈련원 식구들과 함께 담양에 왔다. '소쇄원' 앞에서 매표를 하며, 누군가 농담처럼 말한다. "이 돈으로 우리는 고즈넉함을 사는 거야." 여기 몇 번 와 본적 있는 나로선 동의할 수 있었다. 바람과 대나무 소리, 또르르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 소쇄원의 제월당에 앉아 있으면 세상 모든 여백을 모아놓은 듯 마음이 쉰다. 수려하지 않아도, 찬란한 고요를 선사해주는 곳이다. 푸른 대나무숲 사이를 한발 한발 거닐어 제월당에 이른다. 허나 우리는 뜻밖의 불청객을 마주했다. 

그 분은 소쇄원의 '문화관광해설사'다. 원래 예약제로 운영하는데, 우연히 마주쳤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뭔가 찜찜했다. 고요가 깨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해설사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우렁찼고, 표정은 확신에 차 있었다. 우리를 보자마자 첫마디를 이렇게 던진다. "물어볼 거 있으면 뭐든 물어 보세요." 대답이 없자, 다시 묻는다. "뭐든 물어봐요! 뭐든." 아! 이 공백을 아는가, 서로가 견뎌내야 하는 불편한 공백. 근데 애석하다. 딱히 물어볼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텍스트를 좋아하는 터라 대략적 내용은 이미 읽었다. 더군다나 해설사를 요청한 적도 없다. 아니 단적으로,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묻고 알려는 지적 갈망이 없었다. 단지 조금의 여백을 가지고 싶었을 뿐이다. 자연을 벗 삼은 고요함이 필요했다. 그러니 나는 왠지 해설사가 여백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꼈다. 뭐든 물어보라는 물음에, 아무 대답이 없자 해설사는 "아, 문화재 볼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네" 하더니 "뭐든 물어봐요, 뭐든 물어보라니깐." "뭐든 물어보라고요." 계속 재촉만 한다. 재촉이 이어지니, 순간 짜증이 일어났다. 재촉을 듣다 못한 누군가의 질문, 이어지는 해설사의 설명에도 난 마음이 요란하다. 

'고요함을 누리고 싶어 여기 앉았다고! 도저히 못 앉아있겠다' 생각한 나는, 벌떡 일어나 아래쪽 건물로 향한다. 아래의 건물에 내려와 가만히 눈을 감는다. 비로소 대나무 스치는 바람소리, 계곡 깊은 물소리에 마음이 쉰다. 내가 원한 그 순간이다. 그리고 마음이 고요해지니, 비로소 치명적인 나의 오류를 발견한다. 

대종사는 "유마경에 이르시기를 '보살은 시끄러운 데 있으나 마음은 온전하고, 외도(外道)는 조용한 곳에 있으나 마음은 번잡하다'하였나니, 이는 오직 공부가 마음 대중에 달린 것이요, 바깥 경계에 있지 아니함을 이르심이니라"고 법문했다. (<대종경> 수행품 50장) 

보살은 시끄러운 데 처해도 마음은 온전하다. 그런데 나는 왜 그 자리에서 온전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했나. 왜 내 마음에 '해설사의 목소리'와 '바람소리'가 평등하지 않을까. 단지 집착이었다. 고요에 대한 집착. 내가 온전했다면, '그 순간' 해설사의 목소리에도 찬란히 고요할 수 있었을 거다. 해설사의 소리가 내 마음의 고요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소리가 내 마음의 고요를 빼앗았다. 자리를 옮기지 않아도 분명 고요할 수 있었음을, 자리를 피한 어리석음 후에 발견한다. 그 자리에서 온전했다면 해설사의 소리도 바람 소리도 모두, 부처님의 음성임을 알았을 텐데. 

/중앙중도훈련원

[2019년 1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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