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도성 도무] '마음공부'라는 말을 〈원불교사전〉에서 찾아보면 '우리의 본래 마음을 찾아 깨쳐 기르고 사용하는 공부. 모든 공부 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공부이다'고 되어 있다. 〈원불교사전〉의 설명은 마음공부가 곧 삼학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마음공부는 모든 공부의 근본'이 된다고 밝힌 〈대종경〉 요훈품 1장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사전에 나오는 마음공부의 정의를 바탕으로 살펴보아도, 대종사께서 펴신 교법 전체가 마음공부이고, 제불 제성의 가르침 전체가 또한 마음공부이며, 물질개벽에 대응하여 정신개벽을 이루는 공부, 제생의세를 추구하는 모든 공부가 다 마음공부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마음공부를 삼학에 한정하여 본다 해도, 그 '범위'가 매우 넓다. 이는 〈정산종사법어〉에서 정산종사가 과거의 계정혜 삼학과 우리의 삼학을 비교해서 말씀한 법문에 잘 담겨있다. '과거에도 삼학이 있었으나 계정혜와 우리 삼학은 그 범위가 다르나니, 계는 계문을 주로 하여 개인의 지계에 치중하셨지마는 취사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모든 작업에 빠짐없이 취사케 하는 요긴한 공부며, 혜도 자성에서 발하는 혜에 치중하여 말씀하셨지마는 연구는 모든 일 모든 이치에 두루 알음알이를 얻는 공부며, 정도 선정에 치중하여 말씀하셨지마는 수양은 동정 간에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는 일심 공부라(경의편 13장)' 하며 마음공부의 범위를 크게 확장했다. 

'모든 작업에', '모든 일 모든 이치에', '동정 간에', 이런 표현은 마음공부에 대한 기본적인 범위와 인식을 뛰어넘게 한다. 실로 마음공부 아님이 없는 것이다. 비록 마음공부를 한다고 내세워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모든 일 모든 이치에 두루 알음알이를 얻고 취사하는 공부가 아니면 과거 좁은 계정혜 마음공부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공부가 어떤 특정 유형의 공부를 따로 지칭하는 말이 될 수는 없다. 항간에 사용하고 있는 마음공부라는 말은 재고되어야 한다. 마음공부는 수행만을 뜻하지 않고, 신앙이기도 하고 수행이기도 하여 신앙과 수행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일상수행의 요법에 수행문 삼학 팔조와 신앙문 사은 사요를 망라해 놓은 것이다. 아울러 마음공부는 상시훈련과 정기훈련이기도 하고, 염불과 좌선이기도 하다. 마음공부는 무시선이기도 하며, 의두 성리이기도 하다. 또한 마음공부는 일기법이기도 하고, 불공하는 법이고, 심고와 기도이기도 하며, 계문이기도 하다. 마음공부는 최초법어의 가르침과 실행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특정 유형의 공부 방법에 마음공부라는 말을 붙여 사용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그런 유형의 마음공부에 참여하지 않으면 마치 마음공부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런 유형만이 마음공부의 전부라고 잘못 알려져 더 다양한 마음공부, 교법 전체를 만나는데 장애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마음공부를 수행적인 면으로만 인식하게 되어 신앙적인 면이 배제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마음공부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어떤 마음공부를 내세울 때는 그 분야와 유형에 합당한 명칭을 따로 사용하여 혼동과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원경고등학교

[2019년 1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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