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활동 통해 행복과 존재감 느껴
국제 NGO구호활동가로 실력 쌓아갈 터

김여원 교도

[원불교신문=김여원 교도] 나는 아프리카어를 전공하는 대학생이다. 사람들은 내가 아프리카어를 전공한다고 하면 '봉사활동 하기 위해 선택한 전공'인지, 'NGO에서 일하려고 하는지' 등을 물어보곤 했다. 내 대답은 '아니오'였다. 나는 그저 아프리카인과 그들의 문화가 궁금했고, 어릴 적 꿈인 의사가 된다면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는 이유로 남아프리카어 전공을 선택했다.

어느 날, 청소년국 안성오 교무가 내게 '인도네시아 지진 피해 복구 사업의 통역으로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녹슨 영어실력이 마음에 걸렸지만 좋은 일이라는 생각에 결정했고, 다행이 공익복지부 교무들도 좋게 봐줘서 구호 사업에 함께 참여하게 됐다. 자카르타 행 비행기를 타던 날,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여진의 위험이 있었기에 첫째는 안전, 둘째는 혹여나 나의 실수, 부족함으로 일을 그르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를 믿고 법신불 사은님의 위력을 믿는 것뿐이었다.

재난 현장에서 내가 맡은 일은 현지 NGO 직원과 소통하고 피해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일이었다. 피해 마을 8군데 중 총 6군데 마을을 돌아다녔는데 바닷가 주변 지역은 수많은 건물들이 잿더미로 변해있었고, 마을 중심으로 갈수록 피해는 덜했다. 이재민들은 NGO에서 지어 준 천막텐트와 임시거처에서 살고 있었다. 문이 없어서 흙먼지를 매일 마시고 피부병으로 고생하기도 하고 식량이 부족해서 겨우 끼니를 면하고 있었다. 수백 명이 사는 마을에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는 곳도 있었다. 

신기한 것은 큰 피해를 입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표정이 대부분 우리보다 밝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내 피부가 하얗다며 자기 팔과 내 팔을 대보며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재해 현장을 다니면서 트라우마가 생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들의 밝은 에너지 덕분에 힘을 얻고 행복을 느꼈다.

숙소에 돌아와 쉬는데 문득 나를 따라다녔던 인도네시아 아이들이 떠올랐다. 한국전쟁 때 미국인 뒤를 졸졸 따라다녔을 아이들과 겹쳐보였다. 어려운 시절을 딛고 우리나라도 이제 드디어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나라가 됐구나. 뭉클함과 동시에 책임감이 생겼다. 인도네시아  팔루 사람들이 행복했던 그 때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우리의 지속적인 도움과 기도는 필요해 보였다.

구호활동을 하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우리와 함께 했던 인도네시아 이슬람 단체 '무하마디아(Muhammadiyah)'였다. 무하마디아는 원불교와 공통점이 많았다. 이슬람교를 현대생활에 맞게 개혁했고 교육과 자선 활동에 적극적이었으며, 신문과 방송 등 여러 매체를 가지고 있었다. 국내 및 국제 구호활동의 경험이 많아서 배울 점도 많았다. 그들은 항상 사람을 중심에 두고 생각했고 피해자들이 구호활동으로 인해 2차 피해를 겪지 않도록 세심하게 고려하는 점 등이 느껴졌다. 현지 NGO 직원들은 우리와 함께 하루 종일 일하며, 피곤할 텐데도 항상 웃는 얼굴로 맞이 해주었다. 무하마디아와 모든 직원들에게 이 지면을 빌어 꼭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다.  

이번에 구호활동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느꼈다. 가장 큰 건 아마도 이 일을 하면서 느꼈던 행복감과 내 존재에 대한 만족감이었다. 참 오랜만에 내가 정말 쓸모 있는 사람임을 느꼈다. 그리고 진로도 아주 명확해졌다. 바로 국제 NGO에서 구호활동가로 일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돌아온 후로 인도적 지원 활동 교육도 받고 세계 여러 NGO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면서 더 많은 공부와 탄탄한 외국어 실력이 필요함을 느꼈다. 

앞으로 인류의 빈곤, 무지, 질병, 재해 재난이 없도록 하는데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고 싶다. 함께 했던 강명권·김효성·이혜진 교무 그리고, 원불교 재해재난 구호대가 무사히 구호활동을 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한다. 인도네시아 팔루에 그들의 웃음처럼 찬란한 새 아침이 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산본교당

[2019년 1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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