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아! 춥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현재시간 22시, 종 치는 중이다. 훈련원엔 종각이 있다. 영롱한 종소리는 훈련원의 새벽을 열고, 저녁을 닫는다. 매일 새벽 5시 33타, 저녁 10시 28타 어김없이 종이 울린다. 이것은 라이브다. '늘' 종이 울린다는 건, '늘' 종 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 사람이 나다. 최저기온을 갱신한 날이라, 발목이 끊어질 듯 시리다. 아, 오해는 말자. 본디 추위를 타지 않는다. 손과 발도 따뜻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겹이나 입고 나왔어도 매우 춥다. 

10타쯤 치고 나니, 아직도 18타 남았다. "왜 이렇게 많이 남은거야" 상대성이론을 절로 떠올릴 만큼, 시간이 안 간다. 덜덜 떨며 계속 치다 그동안 종 쳐온 분들의 노고에 새삼 감사하다. "종칠 때 추워요"했던 담백한 표현이 '어떤 치열함'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사람은 역시 경험해야만 아는 것도 있다. 

종을 계속 친다. 드디어, 5타 남았다. 온 몸에 한기가 서린다. "주말이라 훈련원에 들을 사람도 몇 없는데, 그만 칠까" 누가 세고 있는 것도 아니니, 완전범죄가 가능하다. 다만 "그만 하자"하고도, 이놈의 양심이 문제다. "그만 칠까 마저 칠까" 내적 고뇌가 깊어지자 문득 스치는 한 생각. "이 추운 날, 나는 왜 종을 치고 있는가" 물음이 무색할 만큼, 잘 알고 있다. 

종소리로 온 세상의 생령을 깨우는 거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위로하는 거다. 아! 생각이 전환된다. 갑자기 마음이 경건해졌다. "온 생령이여, 응하소서!" 비로소 마음 다해 종을 친다. 아이고, 문득 아깝다. 시작했을 때부터 왜 치는지, 까닭을 반조했다면 이 시간이 괴롭고 추운 시간이 아니었을 거다. 양심과 편법이 넘나드는 시간도 아니었을 거다. 추위와는 상관없이, 숭고하고 행복한 시간 이었을 게다. '목적반조'를 못했다. 

학창시절 향타원 종사에게 질문했던 때가 있다. "가끔 기도하기 싫은 마음이 나요. 일원상서원문 10독 하는 중에, 3독하고 '그만할까' 5독하고 '그만할까' 자꾸 그만 하고 싶어요." 기도일념이 지극한 어른이라, 뭔가 답을 줄 줄 알았다. 그런데 "뭐? 그런 생각이 든다고? 이상하다. 왜 그러지?" 당신의 머릿속에는 없는 단어인 것처럼 생소하게 여기는 것을 보며, 나 역시 이상했다. '아니. 그런 마음 날 수도 있지, 왜 이해를 못하지?' 그런데 지금, 번쩍! 향타원님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 분은 기도하는 찰나찰나 목적반조가 된 어른이다. 그러니, 단 한 번도 간절하지 않은 적이 없었을 거다. 간절한데 그만하고 싶을 리 있겠는가. '기도를 하면서도 목적반조를 못하고 다분히 의무적인 나'를 '늘 간절히 기도를 했던 어른'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산종사는 "도량에서도 조금만 방심하고 챙기지 아니하면 부지불식간에 본분을 매각할 염려가 없지 않나니, 그대들은 이에 크게 주의하여 시간을 지낼 때마다 경계를 당할 때마다 한결 같이 우리의 본래 목적에 반조하기를 잊지 말라"고 법문했다. (〈정산종사법어〉 무본편 24장)

목적반조, 그 일 그 일 '까닭'을 생각하자. 그것 하나면, 내가 하는 모든 자잘한 일들이 우주의 일이 된다. 

/교학대서원관

[2019년 1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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