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우리들 책임이 다른데 있는게 아니야. 먼저 떠나신 선진들이 걱정하는 교단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지. 선진들은 후진들을 귀하게 알고, 후진들은 선진들을 귀하게 알아서 서로 업어주는 심정으로 한 마음으로 교단 모든 일에 합심해야지."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아지는 것들이 있다. 답은 애초부터 거기있었다는 사실이다. '파랑새이야기'의 교훈처럼 말이다. 교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란 질문에 규타원 장정수(77·規陀圓 張正髓) 원로교무의 답은 평범했지만 울림이 컸다. 서로 소중한 줄 알고 일심합력하는 일. 그것이 선진들이 걱정하지 않는 교단임을 말이다.

총부의 하숙생
전북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에서 태어난 그는 원기39년 14살 나이로 총부에 하숙하게 된다. 화포, 만경, 구의, 김제 등 네 곳에 교당을 세울 정도로 신심과 공부심이 장한 어머니(손타원 김양정)의 바람 때문이었다.

"당시 총부 사정이 열악한 때였지. 초창기에 대종사님 곁을 보필하셨던 장적조 선진같은 어른들을 모시기 위해서 최초로 양로당도 생기고 그럴때야. 그곳에 살다보니 칠산님도 뵐 수 있었어. 그래서 칠산님께 백지혈인 어떻게 나투셨냐고 여쭈었지. 그러면 '몰라. 우리는 그냥 하라는대로 했을뿐이여' 그러셨거든. 지금도 기억이 참 사심없는 천진한 어린이 같으셨어."

당시 총부 구내의 부장실 옆에 붙어있는 방을 교당으로 만들었는데 이리교당이었다. 그는 여기 학생회를 다니며 총부 구내 어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방도 없는 총부에 손님은 많았다. 기차가 대중교통이었던 시절이라 하룻밤 묵고 가야 하는 손님들로 말이다. 

"금강원에 육타원님, 용타원님 모시고 총부 사무실 직원들이 같이 살았지. 외부 손님이 오셔도 총부 구내에 방이 없어서 다 세탁부에 딸린 방 하나에 주무시고 했어." 조실 출입이 매우 자유로워서 드나드는 손님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는 정말 가족같은 분위기였지. 항상 정산종사께서 조실에 계시니까 모든 사람이 거침없이 들어가는거야. 공적인 업무도 있었지만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아들이 죽었다고 찾아오고, 무슨 어려운 일 때문에 힘들다고 찾아오고. 정산종사님은 다 들어주셨거든."

정산종사와 쌀밥
어려운 시절이었던 때라 총부에는 하루 식량이 부족해 여기저기 얻으러 다니기도 했다. 보리밥이라도 굶지 않고 먹으면 다행이었다. 유일한 쌀밥은 조실의 정산종사에게 올려드렸다.

"정산종사께서는 매 끼니마다 올라오는 쌀밥을 먼저 드시지 않고 뚜껑에 덜으셨어. 그러면 시자들이 그것을 양로당으로 날라와. 양로당 할머니들은 순번대로 그 쌀밥을 드셨지. 나도 2번 얻어 먹었어. 지금도 그 밥처럼 맛있는 밥을 먹어본 적이 없어. 양로당 어른들도 순번 돌아오는 것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리셨는지 몰라."

양로당 어른들에게는 귀한 쌀밥도 쌀밥이었지만 무엇보다 정산종사 같은 부처님과 인연맺어야 다음생에 또 만날 수 있다는 신심이 컸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겨 정산종사의 쌀밥 공양 순서를 놓쳐버리게 되는 일이 발생하면 그 안타까움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어려웠던 총부는 당시 경상도에서 먹여살린다고 할 정도로 항타원 이경순 교무와 달타원 이정화 교무가 거의 대부분을 조달했다.

"그 시절도 초창기로 봐야해. 당시 전무출신 다 해봐도 50명이 안됐어. 그때는 경상도에서 그렇게 많이 후원이 들어왔어. 항타원, 달타원 그 어른들이 교당으로 들어오는 것 하나도 안잡수시고 다 총부로 가져오셨거든."

밀가루와 집 한채
가난한 총부 생활을 하면서 그는 6년간 이리여자중학교, 이리여자고등학교를 다녔다. "내가 원기39년 14살에 왔으니까 19살에 원불교학과를 들어갔지. 그리고 그때 시절만해도 스님들처럼 상좌제도가 많이 있었어. 공타원님, 용타원님 상좌가 많이 계셨지. 나도 14살에 용타원님 상좌로 살았어."

원불교학과를 졸업한 이듬해 원기49년 1월 최초로 졸업생 훈련을 받게 된다. 당시 21일간 훈련이 교무자격고시의 전신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교무로 나갈 때는 환경이 열악했어도 교화가 잘될 때였지. 한국사회에서 원불교하면 다 믿어야 하는 종교로 알았거든. 어느 교당에 가든지 지역유지나 지식층이 따라주셨어. 일요일이면 보통 60~70명이 왔지. 김제교당에 혼자 부임했을 때도 유년회, 학생회, 청년회, 일반법회 다 만들었지."

교화하는 보람이 컸다. 천주교 신부들은 '원불교 교무가 밀가루 한 되 가지고 들어가면 집 한채 지어놓고 나온다'는 농담을 들을 정도였다. 고생했던 일도 결코 만만치 않았지만, 당시 한국사회에서 교무의 위치는 엘리트 집단에 속했다.

"그때 교무님들은 청소하는 법부터 음식하는 법까지 일상생활의 모든 면을 다 가르쳤거든. 공부도 가르쳐주고, 교리도 가르쳐주고. 새마을운동은 집이나 마을을 새로 정비하는 일이었지만, 생활방면은 우리가 맡았던 격이지. 그 지역에서 교무들은 완전히 선구자였어."

그랬다. 자녀교육부터 시작해 집안의 예법이나 살림하는 법 등 각종 상담과 모든 생활 방면 지식 전달이 교무의 역할이었다. 그는 김제교당, 안동교당, 돈암교당, 진북교당을 거쳐 원기71년 원광의료원 교당, 원기93년 순교감으로 근무하다 원기96년 퇴임했다.

어머니의 훈육 은혜
"어느 후진이 묻더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후회하신적 없냐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후회가 없다. 내가 다른 사람 구제했다고 장담은 못하겠지만 나를 이만큼 구제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고, 보통 욕심에 묶여 일생을 사는데 그러지 않아서 행복하고, 대종사님 법 만나 공중에 나를 던지고 살아서 행복하다고 이야기했어."

그가 이렇게 행복함을 알기까지는 어머니의 훈육이 컸다.

"내가 법 있는 부모 만난 게 큰 복이었던거 같아. 나에게 항상 자력인으로 살 수 있도록 훈련시켜 주셨거든. 나는 총부에 하숙하러 들어갈 때에도 집에서 하숙비를 쌀로 실어다 주셨고, 원광대학교도 사비를 내고 다닐 정도로 집안이 좀 됐어. 집에도 일하는 분들도 계셨지."

중학생 시절 방학에 집에서 일주일 지내게 되면 어머니는 일하는 사람을 보내고 직접 불 피워 밥을 지어먹게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에도 아침마다 청소하고 풀 뽑도록 하고, 어머니가 직접 옷을 빨아준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데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집에는 밥 얻어 먹으러 오는 20~30명의 사람들로 항상 북적였다.

"전무출신한 것도 어머니께서 기뻐하실 일이기 때문에 두 번 생각도 안했어. 나는 이 생에 제일 큰 복을 받은 게 우리 어머니같은 스승을 만날 수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 같애. 천도독경도 내가 따로 연습한 게 아니야. 어릴적부터 아침저녁으로 기도하시고 독경하시던 어머니 목소리를 들으며 컸기 때문이지. 마음 속에 항상 모시고 살아."

절대 바라는 마음없이
그는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질 수 있고, 교단에도 일심합심할 수 있는 비결 하나를 알려주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가운데 사심없이 한마음으로 일관된 삶이 가장 보람된 삶이라 생각해.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라는 마음 없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살 것인가만 죽는 날까지 그것만 생각해. 이게 삶의 목표고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이야. 살면서 절대 누구에게 바라는 마음없이 살았어. 그러니까 지옥생활을 안했지. 그러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

[2019년 1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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