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한 도반이 묻는다. "어머니 좋아하는 음식 뭐예요? 사드리고 싶어서." 난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니, 대답을 시작했다. "음, 전복을 잘 드시고요. 아, 전복은 내가 좋아해서 같이 드시는 건가? 음, 소고기요. 아! 나 먹으라고 매번 사오는 건가? 엄마는 글쎄? 다 잘 드시는 것 같은데요." 기억을 연속 사진처럼 떠올려 봐도, '내가 좋아해서 어머니가 만든 음식' 뭐 이런 장면 뿐이다. 우리 어머니는 어떤 음식을 좋아할까? 나의 머뭇거림에 도반이 쐐기를 박는다. "원래 부모는 자식 좋아하는 것 다 알아도, 자식은 부모가 좋아하는 것 모르는 거래요." 

너무 맞는 말이라, 그 말이 아프다. 그래, 자식은 모른다. 그와 관련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얼마 전, 어머니의 취향을 처음 알았다. 어머니와 어머니 친구, 나 이렇게 세 사람은 아귀찜을 먹으러 갔다. 난 아귀찜을 꽤 좋아한다. 입맛 없고, 속 허한 날엔 그보다 좋은 것이 내겐 없다. 한참 먹고 있는데, 어머니가 자꾸 내 앞에 '아귀찜 살' 부분을 가져다 둔다. 이 하얀 살이 난 또 그렇게 맛있다. 어머니는 내 취향을 정확히 안다. 그런데 문득, 어머니는 껍질만 골라드시고 있었다. 함께 아귀찜 먹은 세월이 얼마인데, 오늘 비로소 내 눈에 띈 거다. 

마음이 시리다. 눈물이 핑 돈다. 난 다행이도 여전히 철부지는 아니다. 좋은 것을 나만 먹을 수는 없다. 마음이 울컥해진 나는 갑자기, 껍질만 골라먹기 시작했다. '껍질이 다 없어지면 살을 드시겠지.' 드시란다고 드실 리 없기에, 한 발 더 나간 내 영특함이 내린 결정이다. 껍질을 네 개째 먹고 있을 즈음, 처리 할 껍질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다. 갑자기 어머니 친구가 웃으며 말한다.

"아, 혜성교무도 역시 엄마 딸이네, 엄마처럼 껍질 좋아하는구나?" "네?? 어머니가 껍질을 좋아한다고요?" 난 귀를 의심했다. "응~ 몰랐어? 너희 엄마 퍽퍽한 거 싫어해" 아. 어머니는 단지 좋아하는 것을 드시는 중이었다. 어머니의 취향을 모른 내 만행이다. 쓸데없이 '어머니는 좋아하고, 나는 싫어하는' 껍질만 마구 먹고 있었다. 웃기고도 슬픈 일이다.

'사랑의 크기는 관심의 크기와 같다.' 어머니는 자식이 뭘 좋아하는지 아는데, 자식은 모른다. 내가 꽤 관찰력이 있는 사람임에도, 어머니에 절대 못 따라간다. 그러니 사랑의 깊이는 가늠조차 어렵다. 대산종사는 "여래의 마음에는 밉고 예쁨이 한때의 경계로 나타날 뿐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은 부모가 모든 자녀를 다 사랑하는 마음과 같으니라"고 법문했다. (〈대산종사법어〉 법위편 40장) 

부모의 마음은 여래의 마음과 같다. '밉고 예쁨이 한때의 경계일 뿐, 온전히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 내 교전 맨 앞엔, 지금 말하기엔 더 부끄럽게도 '세상의 어머니'라고 적혀있다. 이것은 나의 서원이다. 한 두 사람의 어머니 말고, 세상의 어머니가 되고 싶다고 결심한 출가의 길이다.

나는 그 길의 어디쯤 서 있나. 세상의 어머니는 커녕, 나는 심지어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부모와 같은 사랑을 줄 수 있는가.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여래와 같은 마음으로 대하는가. 부모의 사랑을 떠올리면, 나의 수행이 얼마나 표피적인지 다시금 반조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 부모의 사랑을 통해, 또 수행을 배운다. 

/교학대서원관

[2019년 1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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