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심법 〈정전〉을 응용하고
문답·감정·해오를 얻는 공부 ②

[원불교신문=오덕진 교무] 마침표를 찍으면 도가 아니듯이(道可道非常道), 정답은 없고 명답만 있듯이(無有定法) 스승은 똑같은 질문을 하는 열 명의 제자에게 각각 다른 답을 하고, 한 제자가 같은 질문을 하더라도 오전과 오후의 답을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문답은 공부의 방향로를 제시할 뿐입니다. 구전심수(口傳心授; 문답 감정 해오) 정법 아래 각자 산 경전 큰 경전으로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공부인: 한국이나 외국이나 뒤에서 남의 말 하는 걸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하면 배 아파하고 시기 질투합니다. 타지(他地)에 나와 일한 지 어느덧 한 달이 넘었어요. 힘든 일도 많았고 이제 막 오픈한 곳이라 손이 더 많이 가서 그만큼 사람들에게 정이 많이 갔습니다. 그런데 오픈하자마자 각자 자기 매장 매출에 신경전을 벌이더군요. 왜 그럴까요? 어차피 대표님은 한 분인데 왜 우리끼리 그런 경쟁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인간관계는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지도인: 이것이 살아있는 인간관계 작용?! 이 세상(사회생활, 집단생활)은 대소 유무의 이치로써 건설되고 시비 이해의 일로써 운전해 가나니….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뒷말을 하기도 하고, 배 아파하기도 하고, 시기 질투도 하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며 경쟁합니다. '이것이 직장이구나?!'를 모르고 살면 생각이 단촉해지고 마음이 편협해지겠죠. 

▷공부인: 뒷말도 안 하고 싶고, 배 아파하기도 싫고, 시기 질투도 하기 싫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싫어요. 그렇게 경쟁하는 것이 너무 소모적이잖아요. 또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마음 공부하는 거 아닌가요?
▷지도인: 시기 질투하고 경쟁하며 살라고 권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 마음의 성질과 사회의 생리를 이해하자는 거예요. 집단을 이루고 살면 각자 생각과 기질이 달라서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도 다르고, 이익과 해로움의 기준도 달라요. 다른 것이 정상이에요. 백 명이 모여 사는 집단에서 백 명 모두 같은 생각을 한다면 전체주의적 사회겠죠. 

사회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공부길을 잘 인도해주는 법문이 〈정전〉 '사리연구의 목적'입니다. 

[이 세상(공부인의 직장)은 대소 유무의 이치로써 건설되고 시비 이해의 일로써 운전해가나니, 세상이 넓은 만큼 이치의 종류도 수가 없고, 인간이 많은 만큼 일의 종류도 한이 없나니라. 그러나 우리(공부인)에게 우연히 돌아오는 고락이나 우리(공부인)가 지어서 받는 고락은 각자의 육근(六根)을 운용하여 일을 짓는 결과이니, 우리(공부인)가 일의 시비이해를 모르고 자행자지한다면 찰나찰나로 육근을 동작하는 바가 모두 죄고로 화하여 전정 고해가 한이 없을 것이요, (직장 생활) 이치의 대소 유무를 모르고 산다면 우연히 돌아오는 고락의 원인을 모를 것이며, 생각이 단촉하고 마음이 편협하여 생로병사와 인과 보응의 이치를 모를 것이며, 사실과 허위를 분간하지 못하여 항상 허망하고 요행한 데 떨어져, 결국 패가 망신의 지경에 이르게 될지니, 우리(공부인)는 천조의 난측한 이치와 인간의 다단한 일을 미리 연구하였다가 (공부인)의 실생활에 다달아 밝게 분석하고 빠르게 판단하여 알자는 것이니라.]

▷공부인: 제가 시비 이해가 없기를 바라고 있었네요. 시비 이해가 있는 것이 당연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시비 이해의 일로써 잘 운전하는 것인지 공부하면 되는 건데요.
▷지도인: 금세 핵심을 잘 파악했네요. "Life is 시비 이해의 일?!" 

▷공부인: 산다는 것은 시비 이해의 일 속에서 사는 거군요. 
▷지도인: 이것을 모르면 사회 생활할 때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용납하지 못할 수 있어요.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나와 그 사람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이 기준이 다르고, 이롭고 해로움의 기준이 다른데 내 기준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게 되겠죠. 그렇게 하면 대종사님의 표현대로 생각이 단촉하고 마음이 편협해져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괴롭겠죠. 

▷공부인: 단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이제는 매장끼리 매출 경쟁을 하더라도 그것을 자연스러운 진리 작용으로 보고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기고 싶고, 사장님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은 그 사람이, 내가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 마음의 성질인 줄 아니까요. 시비 이해의 일로써 잘 운전하는 공부 할게요. 

/교화훈련부

[2019년 1월18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