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관행 고집스레 지키려는 관성 들여다봐야
각자의 처지에서 하고 있는 바 뒤집어 볼 일

[원불교신문=이성하 교무] 전산종법사는 취임 일성으로 '나를 새롭게, 교단을 새롭게, 세상을 새롭게'라는 법문을 내려줬다. 스스로 한 가지만 새롭게 해보려 해도 업습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자아(EGO)의 차원에서 우리는 별로 새로워지고 싶지 않다. 이미 나는 나에게 너무 익숙하여 새로움은 불편할 뿐이다. 

그런데도 새로워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건대, 혁신과 변화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존재들이고, 이유를 붙일 것도 없이 인간은 그냥 그렇게 타고났다. 인류는 유사 이래 새롭게 변해 왔고, 모든 종은 새롭게 변화했으므로 이제껏 살아남은 것이다. 변하지 않을 때 존재에 위기가 온다. 

모든 것이 자본에 투항한 세상을 살고 있다. 재력을 갖추는 일이 고귀한 인품을 지니고 자신의 본성을 알아가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모든 기성의 종교들이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계속되는 현대 사회에서 경쟁이라는 이유로 사람의 도를 넘는 일은 예사이다. 기후, 환경 문제, 전쟁, 난민, 테러리즘 등 인류가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복잡한 문제들이 많다. 세상이 이리 예사롭지 않으므로 종교는 더욱이 해야 할 역할과 책임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계속되는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한 치안 부재의 국가에서 살고자 탈출한 난민들에게 철벽을 세워 막거나, 내란으로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등지고 떠날 수 밖에 없었던 난민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고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숫자도 받아주지도 않는 이기적인 무관용의 정치적 해법보다 좀 더 인류 보편의 공존을 생각하는 해법과 행동력을 누가 보여줘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진정 제생의세의 사명을 생각하며 나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교단이라는 재가출가 공동체가 우리 자신의 울타리 변화조차도 도모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세상은 이미 저만큼 나아가 버렸다. 세상의 세속화가 빨라져 종교가 의미를 잃고 그런 시류 속에 교단이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우리가 낡은 관습과 제도를 고집하며 과거의 역할을 벗어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 먼저여야 한다.

나를 어떻게 새롭게 할 것인가? 우리 교단이라는 공동체는 어떻게 새로워져야 하는가? 우리 교단 내에 깊이 배어있는 제도적 관성을 밝히는데 그 해답이 있을 것 같다. 교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조직의 낡은 관행, 제도들을 고집스레 지키려는 그 관성을 들여다봐야 한다. 

예를 들어 원불교학과의 지원자가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특히 여학생 지원자는 한 손으로 헤아릴 정도다. 뿐인가? 몇 안 되는 인재가 학부시절을 버티지 못하거나, 혹은 학부를 졸업하고 교역 현장으로 넘어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원불교학과의 교육 환경과 방침, 특히 그간 여학생 교육에 대한 심각한 재고가 있어야 하고 나아가 여성 교역자의 삶이 지향 모델이 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연구와 제도적 개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학부생이던 90년대 초반과 지금 원불교학과 여학생들의 일상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가 전혀 다른 시대를 경험한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방식의 교육이 몇 십 년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통하지 않는 제도를 고집함으로써 스스로 소멸해 가고 있다. 

교당은 어떤가? 교단의 구성원으로 또한 일선 교당의 책임자로서 나 또한 내가 하는 말 가운데 어느 것으로도 자유롭지 못하다. 교당 교화에서 우리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일까? 예를 들자면 법회는 교당에서 본다. 교당 공동체를 성장 시키는 것은 사이즈를 키우는 것이다. 교무는 교법이 필요한 외부 사람들 보다 교당의 교도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법회는 순서가 있다. 절하고 독경하고 심고 모시고 법문 봉독하는 등의 순서가 매주 반복된다. 설교는 가장 중요하다. 교무는 앞장서고 교도는 뒤따른다. 행사는 어렵지만 하면 좋다. 

이런 생각들. 이것들은 정말 새로워지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무엇을 새롭게 할 것인지, 각자의 처지에서 하고 있는 바를 뒤집어 볼 일이다. 그대로 살아도 괜찮은 것인지.

/샌프란시스코교당

[2019년 1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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