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1935년 도산 안창호가 출옥 후 호남을 방문하면서 익산 총부를 들렸다. 그는 소태산에게 "이렇게 동포 대중에게 공헌하면서도 직접적으로 큰 구속과 압박은 받지 않으시니 참 장하십니다. 판국이 넓고 운용하시는 방편이 능란하십니다. 불법연구회의 종사주는 조용히 참으로 큰일을 하고 계십니다"라고 수행인과 모인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일제의 압박이 극심해지던 시기에,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길룡리 간척사업을 성공시켜  불법연구회의 저력을 보여줬고, 강자·약자 진화상 요법과 자력 양성 등을 가르쳐 민족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지도자였기에 당시 일제에게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위력을 경험한 일제는, 조선인 사상가가 출현하는 것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실제로 안창호가 소태산의 불법연구회를 방문했다는 보고가 들어간 이후로 일경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기미년 만세 운동 때 소태산 대종사는 "개벽을 재촉하는 상두소리니 바쁘다. 방언 마치고 기도드리자"고 했다. 불법연구회는 서슬 퍼런 일제에 정면으로 항거치 않고 순응하는 듯 지혜롭게 피해가며 조용히 민중의 정신 계몽운동을 했다. 일례로 정산종사는 황도불교화를 강요받자 부산으로 출장을 핑계 삼아 피신한다. 총부의 제자들이 종법사의 부재중임을 이유로 미루는 사이에 마침내 광복을 맞았다. 

같은 시기의 민족 지도자인 안창호 선생과 소태산 대종사가 민중을 위해 활동한 방식은 사뭇 다르다. 이것은 종교와 정치의 역할이 서로 다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건국 초기 한 정객이 정산종사에게 시국이 불안하고 할 일이 많으며, 종교도 나라가 있은 연후에야 있는 것이니, 정당에도 참여하고, 민족 운동도 일으켜서 건국에 힘을 써주시기를 청했다. 이에 정산종사는, 정치와 교화와 생산이 그 맡은 바 분야에서 서로 힘을 합하지 않으면 나라를 건설하지 못하는 것이니, 각자의 역할에 주력하여 그 합력으로써 나라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답한다. 또, '전무출신은 교단 일에 전임하고 있으므로 정치에 뛰어들기는 어려우나 재가교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으며, 종교의 교화를 잘 받은 사람이어야 정치도 잘 할 수 있다'고 한다.         

대산종사가 서울 한남동에서 서울 출장소장으로 근무할 당시에는 백범 김구선생이 자주 한남동에 발걸음 했다. 백범 선생은 대산종사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내가 중국에 있을 때 국민의 정신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핵심 된 불교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불법 연구회가 바로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종교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정치와 종교의 역할을 한 가정에 엄부와 자모로 비유했다. 한 가정에서 엄부와 자모가 각각의 위치에서 역할을 하며 자녀를 잘 기르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힘쓰듯이, 정치와 종교도 그 역할은 다를지언정, 이 지상에 평화 낙원 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같이 힘을 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산종사는 "어떤 국가의 영도자가 총부를 방문하더라도 정성을 다해 환영하고 맞이하되, 오직 중도로서 잘 인도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종교인들이 새겨 표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미주총부법인

[2019년 1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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