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김관진] 최근 학교 교육에서 인성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다. 학교 현장에서 보는 아이들의 모습은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어떤 배려나 선물에도 감사하다는 말을 잘 할 줄 모르고 당연하게만 받아들인다. 자신의 손해는 조금도 참아내지 못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에는 무감한 아이들도 많다. 특히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순간적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아이들의 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태연하게 자기 부모님에 대해 상스러운 욕설을 늘어놓는 아이를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아마 아이들이 학교에서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집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지는 않을 터이니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과 인성교육에 대해서 말 하다보면 느끼는 아쉬움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성을 마치 영어와 수학처럼 수업을 통해 보충을 하듯이 교육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안하는 것 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좋다는 주장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입시 위주의 경쟁적 교육 시스템을 건드리지 않고 좋은 인성의 이념들만 학생들에게 주입한다고 인성교육이 이뤄질 것이라는 생각은 비현실적이다. 아마도 몇 년 전 '인성교육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법으로 강제해서 일정 시간 이상 인성교육을 시키면 아이들의 인성이 좋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그런 것이었으리라. 

옆자리 친구보다 1점이라도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밤늦도록 학원을 순회하는 것이 일상이 된 아이들에게 '수학 문제 한 문제 더 푸는 것보다 인성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을까? 사회 전체가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승자만이 트로피를 차지하게 된다고 온몸으로 가르치면서 인성교육 시간에만 바른 인성이 더 중요하다고 강변한다고 해서 교육이 될까? 

지식 교육과 인성 교육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다. 사람을 바른 행동으로 이끄는 데에 도덕성 교육과 지식 교육은 분리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다른 영역으로 교육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지금이 일제 강점기라면 우리는 어떤 사람을 바른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할까?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의 말을 잘 듣고, 법을 잘 지키며 순종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존경받을 만한 삶이라고 생각할까? 아마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가를 존경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부당한 지배에 항거하는 의지는 어디에서부터 나올 수 있을까? 우리가 존경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심성은 틀림없이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대한 지적 소양에 있을 것이다. 

'인성교육'의 원래 이름은 '교육'이다. 학생들을 바른 인격체로 성장시킨다는 것 외에 어떤 교육의 목표가 있겠는가? 우리 사회가 '인성교육'이라는 별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는 자체가 우리 교육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입시와 경쟁만을 강조하는 교육 체계를 바로잡는 일, 인간의 삶과는 괴리된 교과 교육과정을 개혁하는 일, 학교 내 비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바로 잡는 일이 모두 '인성교육' 강화를 위한 노력들임을 이해하는 데에서 학생 인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야하지 않을까?  

/원광중학교

[2019년 1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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