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업에 대한 생각은 인도에서 발생했다. 업의 산스크리트 원어는 카르만(karman)이다. 조작(造作)이라는 뜻이다. 의지에 의한 행위로 나타난 심신의 모든 활동을 말한다. 일찍이 인간은 어떤 행위 이면에 동기가 있으며, 운명은 이 동기에 따른 객관적인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 사상을 발전시킨 인도에서는 신의 은총과 구원을 바라는 종교적 행위인 제사와 같은 의식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이 업이 윤회의식과 결합하여 깨달음에 의한 해탈의 윤리가 됐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업과 윤회를 곡식의 낱알이 익어 떨어져 땅에 심어지는 것에 비유했다. 선한 행위로 선한 사람이 되고, 악한 행위로 악한 사람이 된다는 인과관계를 윤회를 통해 길게 볼 필요가 생겼으며, 이는 도덕법칙의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동시에 무한대로 책임을 지는 법칙이 됐다.

초기불교에서는 업을 두 측면으로 본다. 일생의 과보를 이끄는 업으로써 육도를 윤회하게 하는 인업(引業)과 인간계에 태어난 개개인에게 그 특성을 부여하는 만업(滿業)이 있다. 또 넓게는 흔히 기세간이라고 부르는 산하대지처럼 많은 생명체들이 공통으로 갖는 과보를 일으키는 공업(共業)과 고유한 몸을 가지고 있는 개개의 생명체에게 과보를 일으키는 불공업(不共業)이 있다. 

다른 식으로는 개인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외적 조건을 공업, 개인의 행위를 사업(私業)이라고도 한다. 이는 개인의 업과 이를 둘러싼 외부의 업이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참회문에서는 우주대자연의 성주괴공, 지구의 춘하추동 사시변화, 인간의 생로병사를 천업(天業)이라 하고, 인간이 삶 속에서 지은 것을 정업(定業)이라고 한다. 앞의 공업과 불공업의 관계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정업은 부처님도 면할 수 없으나,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으면 천업은 임의로 할 수 있다고 한다. 대종사는, 범부 중생은 육도윤회와 십이인연에 끌려 다니지만, 부처님은 천업을 돌파하고 거래와 승강을 자유자재하신다고 설하고 있다(〈대종경〉 불지품 6장).

업과 시간을 관련지어 말하면, 순현업(順現業), 순생업(順生業), 순후업(順後業)으로 나눈다. 순서대로 현생에 지은 업을 이생에 받게 되는 것, 다음 생에 받는 것, 다음의 세 번째 생부터 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업의 결과가 이처럼 시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업의 경중, 업을 둘러싼 인연, 업을 받는 개인의 조건 때문이다. 선악과 관련해서는 선한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업을 선업, 악한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업을 불선업, 선악 어느 쪽도 아닌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것을 무기업(無記業)이라고 한다. 

신구의 삼업 가운데 의업은 석가모니불 이래 모든 조사들이 가장 중한 업으로 설하고 있다. 업이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역으로 본다면, 업은 과거에 주어진 결정적 요소이지만, 현재 내가 살아가는 자유의지의 요소이기도 하다. 

결국 과거나 현재나 선택의 결과이므로 노력에 의한 해탈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즉 끊임없이 참회 수행함으로써, 지구 밖으로 쏘아올린 우주선이 중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항해하듯이, 모든 경계를 돌파하게 되면 업에 매이지 않고 마침내 삼계육도를 자유자재하게 되는 것이다.

/원광대학교

[2019년 1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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