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도성 도무] 이같이 일상수행의 요법 1·2·3조는 그 자체로도 어렵고, 문장 구성 요건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는 비문이다. 또 여러 가지로 제기된 질문과 논란에 대한 답변이며 정보들을 제대로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구성 요건이 갖춰지지 못한 문장을 바탕으로 법문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불완전하게 틀어져 있다는 것이다.

일상수행의 요법 1·2·3조에 대한 일각의 해석과 주장은 다음과 같다. '심지(에)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만나면 저절로 요란함이 있어지므로,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여기서 '심지'라는 물건에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에 따라서 요란함이 있어지는 것'이므로, 경계를 만나면 요란함이 '저절로' 있어지는 건 '진리의 작용'이라, 이는 부처도 그러하다는 것 또한 일각의 주장이다. '경계에 따라' 요란함이 있어지는 것은 성자나 보통 사람이나 한 치도 다르지 않다는 것. 다름이 있다면 순발력의 차이라고 한다.

누구나 경계를 만나면 저절로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있어진다는 생각은 흔히 부처나 중생이나 '제품'은 똑같다는 '개유불성(皆有佛性)'의 근거로 삼고 있는데, 누구나 불성을 갖추고 있고, 부처나 중생이나 '제품'이 똑같다는 깨달음의 근거가 하필이면 경계를 따라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있어지는 것이어야 하는지, 아직 부처가 되어 보지 못한 사람으로서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대종사가 수행품 1장에서 대조하라며 내 주신 말씀, '심지에 요란함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를 보면 누구나 경계를 만나면 자연히, 저절로 요란함이 있어질 텐데, 왜 '없었는가'를 언급했는지, 정산종사도 '대저 이 삼학을 증득하고 보면 억지로 요란하려 해도 요란해지지 않고, 어리석으려 해도 어리석어지지 않고, 그르려 해도 글러지지가 않나니'(지난 11월 16일자 〈원불교신문〉 최봉은 원무의 '〈정산종사 법설〉 풀이 3'에서 재인용)라고 한 걸 보면, 누구나(부처나 중생이나) 경계를 따라 요란해지고 어리석어지고 글러진다는, 그래서 똑같은 '제품'을 가지고 있다는 일각의 주장과 완전히 배치된다.

게다가 이 경계라는 것은 어떤 유형, 어떤 범위, 어떤 인연의 경계를 말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또한 경계에 '따라'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있어지기 때문에, 모든 공부는 결국 '있어진' 요란함을 없게 하는 사후 공부뿐인가. 요란해지지도, 어리석어지지도, 글러지지도 않기 위해 자성을 지키고 심신을 수호하는 사전 공부는 없거나 없어도 되는 것인가. 아무리 양보해도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누구나 경계를 만나면 자연발생적으로 요란해지고, 어리석어지고, 글러지는 그런 존재에 불과한 것인가.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도 과연 어떻게 해야 '없게' 할 수 있는지. 일각의 주장대로 '앗, 경계다' 하면서 알아차리기만 하면 지혜와 정의가 생겨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도리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거나, 천지만엽으로 벌여가는 욕심을 제거하고 온전한 정신을 얻는 수양 공부(〈정전〉 정신수양의 목적), 오래오래 계속해야 할 삼대력 공부는 다 어찌 할 것인지, 참으로 안타깝다.

/원경고등학교

[2019년 1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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