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산 고문국 종사
"한국의 틀에 얽매이지 말고 세계교화하자
재가교도에게 교단 사업의 책임과 역할을 줄 때"

[원불교신문=안세명] 93세 젊은 청년, 보산 고문국(譜山 高文局)종사를 강남 더시그넘하우스 도서관에서 만났다. 천진하게 웃는 호탕함 속에 교단의 결기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강건함은 그가 13세, 어머니(예타원 김성덕 정사)와 함께 소태산 대종사를 처음 뵈었던 소년의 눈빛 그대로였다.
보산 고문국 종사는 한결같은 신성과 서원으로 교법의 시대화·생활화·대중화에 일생을 헌신했다.

소태산 대종사 제자인 우리는 모두 행복자
"버린다는 것이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조금 널찍한 아파트에 살다가 아내(정타원 박이관 대호법·93세)와 함께 지난 5월 시그넘하우스에 입주한 그는 "수십 년 동안 함께했던 살림을 정리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공부였다. 한번 털고 나니 가볍더라. 죽는 연습 미리 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나의 일상은 매우 단순하다. 새벽 5시, 한 시간 정도 선하고 근린 산에 오르거나 실내 운동시설에서 몸 풀고, 식사 마치면 서울대학교 후배들이 만들어준 연구실에 나가서 공부하고 대화한다. 그 재미가 쏠쏠하다"며 "요즘엔 아내의 건강이 안 좋아 많이 곁에 있어주어야 한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돌봐야 한다. 그게 다 행복이고 당연한 이치다"고 평범한 일상 속에 공부가 있음을 말했다.

평생 걷기를 즐겨 왔다는 그는 "나의 건강 유지법은 버스, 지하철, 걷기, BMW(Bus, Metro, Walking)다"며 "우리 대종사의 제자는 모두 해피하다. 인류를 낙원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이 법을 만드셨으니 그 법을 공부하는 우리가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나"고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물리학, 사은사상을 증거하는 화두의 연속
일생을 물리학자로서 인과보응의 이치와 불생불멸의 원리를 연구하고, 사은사상을 실증하는데 적공한 고 원로교도. 만년인 지금, 어떠한 결실을 거두었을까.

그는 "우리 교법은 대종사께서 밝히신 대로 과학의 발전과 병진할 수 있으며 과학적으로 가장 모순이 적은 법이다. 실제로 알고 공부하면 더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제자들 중에서 소광섭·김성구 박사가 내 연원으로 입교해 공부를 아주 많이 했다. 물리학과 불교학의 소통을 통해 영혼 세계까지는 증명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물적 세계에서는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이치가 틀림없다. 현실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과학이며, 이를 통해 처처불상 사사불공 사은사상의 우주적 세계관을 실증할 수 있다"고 일원상 법어의 시방세계가 오가의 소유인줄을 알고 실천하는 삶이 물리학자로서 오랜 화두의 결론임을 느끼게 했다.

미주선학대학원은 유일학림의 가치다
고 원로교도는 미주선학대학원 총장으로서 학교 설립부터 정착까지 한 땀 한 땀 일궈낸 산 증인이다. 개교 18년이 흐른 지금, 미주교화의 방향과 인재양성의 길을 어떻게 조망하고 있을까.
그는 미주선학대학원 총장직을 좌산종법사의 간청으로 수락하면서, 언뜻 20여 년 전 대산종사와의 대화 장면을 떠올렸다. 그가 서울대 부총장에 임명받고 얼마 후, 향타원 박은국 종사와 함께 신도안에 가서 대산종사에게 취임 인사를 올리니 대산종사가 양손 엄지를 높이 치켜세우며 "다음엔 총장 되어"라 했다. 

그러나 부총장직 수행 중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과도한 처벌요구를 거부하다 도중하차 하게 돼, 관례적으로 당연시됐던 총장으로의 승진이 좌절됐다. 그는 스승의 말씀까지 땅에 떨어뜨린 셈이 됐음을 죄송하게 여겨 왔었다. 그런데 이제 그분의 유지사업인 선학대학원 총장을 하라니 그 어른이 학교 창립을 그때 예시 했는가 싶었다.

고 원로교도는 그 길로 미국 현지와 접촉하고 인연동지들과 협력하여 험난한 미주선학대학원(Won Institute of Graduate Studies)의 인가를 기적적으로 받았지만 정작 교단 구성원들의 반응은 냉담 그 이상이었다. 당시 총부에 모인 교무들을 간곡히 설득하면서, 전문성을 갖춘 재가교도들의 교정참여가 교단의 발전에 절심함을 통감했다.

그는 "지금도 미주선학대학원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나는 좌산상사께서 선학대학원 설립을 말씀하실 때 그야말로 성인의 말씀으로 받들었다. 당시 미주교화는 언어나 문화에 대한 아무런 준비 없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현장은 고생의 극치였고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다"며 "인재를 키우지 않고 어떻게 교화가 되겠는가. 교단이 드디어 눈을 떴구나 싶어 희망이 보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정산종사께서 원광대학교 전신인 유일학림을 세우지 않았다면 지금의 교단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며 "당시 내 나이 75세였다. 스승의 경륜에 내 마음이 움직여 가족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서원이 세워졌고, 희생하기로 작정했다"고 영어권 교화의 준비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최근 발표하신 전산종법사의 해외종법사 제도 추진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이제 됐다. 미주교화의 물꼬가 터지는 것이다. 해외시장이 얼마든지 넓다. 원불교의 시장은 한정이 없다"며 "우리가 중앙총부 한국의 틀에 얽매이면 해외교화의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 미주총부가 세워져야 미주교화에 활기를 찾을 수 있다"고 기대를 걸었다.

재가교도 참여가 원불교 2세기의 희망
고 원로교도는 평소 재가교도의 교정 참여와 교단 개혁을 역설해 왔다. 그는 "역사적으로 대종사 당대에는 대종사의 인가를 받으면 누구든지 전무출신이 될 수 있었다"며 "대종사의 법력에 이끌려 사회적 경험과 학식을 갖춘 분들이 창립의 기초를 역동적으로 일궈냈다"고 초등학교 6학년, 대종사를 처음 뵙고 총부에서 느꼈던 강렬한 인상을 전했다.

그는 "교무는 교화의 전문가다. 대종사께서는 경성법전을 졸업하고 변호사를 준비하던 상산 박장식 종사가 출가하니, 바로 총무부장으로 임명했다. 그 전문성과 안목을 높이 산 것이다. 이러한 지자본위 정신이 교단에 절실하다"며 재가교도들에게 교단 사업에 책임과 역할을 줄 때 사명의식으로 뭉친 재가들이 교단의 난제들을 잘 타개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대산종사께서 재가 회장단을 불러 전무출신 복지 후원을 위해 원창회를 조직하게 하셨다. 그 뒤로 총부유지, 해외불사가 그에 추가되니 전무출신 후생은 뒷전이 됐다. 이제라도 원창회의 실질적 운영을 재가들에게 맡겨서 전무출신의 후생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 원로교도는 "이제 다시 재가출가가 함께 도반으로 만나야 한다. 전무출신은 신분이나 서열이 아니다. 대종사께서는 공사에 전무하는 '전무출신'이란 호칭을 주시고 가사로 일시 떠났다가도 다시 전무하면 전무출신이었다"고 하면서 근래에 기독교를 따라서 성직자란 호칭이 사용되는 등, 성속(聖俗)을 초월하여야 할 교단의 성(聖)자 사용의 관행을 우려하면서, 재가출가 차별 없는 열린 자세를 주문했다.

교법으로 공부하고 교단 발전 위해 기도
고 원로교도는 우리 〈교전〉의 현대화 문제를 강조했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우리 교전을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제일 시급한 문제다"며 시대화된 우리말경전 편찬을 주문했다.
끝으로, 그는 "내가 원불교를 만난 지 어느덧 80여 성상이 흘렀다. 개인적으로는 대종사의 교법을 잘 실천하는 열반락을 추구하고 싶고 교단적으로는 5만년 대운의 성공적 구현을 향한 교법의 시대화·생활화·대중화의 지속적 실천을 간절히 염원하고 기도하고 싶다"고 대담을 마쳤다.

[2019년 2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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