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울산교구 당감교당 김덕원 교도
부산울산교구 원봉공회 20년 정성 쏟아
간절함이 빚어낸 기도의 위력 체감

[원불교신문=이은전 기자] '간절히 원하옵건대, 내 손길 닿는 곳, 내 발길 머무는 곳, 내 음성 메아리치는 곳, 내 마음 향하는 곳마다, 우리 모두 다 함께 성불 제중 인연이 되어지이다.'

대산종사 심원송. 당감교당 승타원 김덕원 교도회장(74·勝陀圓 金德圓)의 집 기도 불단에, 그리고 그의 신심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법문이다. 그는 원불교 적십자회 총무, 부산울산교구 원봉공회 회장, 부회장 등 봉공 활동에 오롯한 20여 년을 보낸 그야말로 무아봉공인이다. 그의 손길이 닿은 곳, 발길이 머문 곳, 마음이 향한 곳은 모두 봉공이었다. 그는 지난 해 연말 부산울산교구 봉공회 자원봉사자대회에서 15,233시간으로 대각상을 수상했다. 봉공회 가입 초기를 지나 본격적으로 활동하며 기록이 시작된 날들로 계산해보면 일요일 교당 가는 날을 제외하고 매일 5~6시간을 활동한 셈이다. 마치 직장 다니듯이 매일 교구 봉공회에 출근했다.

"집에서 교구까지 왕복 세 시간이 걸리는데 그때는 그 시간이 길다고 생각되지 않았어요. 무엇에 홀린 듯이 그렇게 들락거리다보니 어느새 20년이 훌쩍 지났네요. 지금 돌아보면 다 감사한 일 뿐입니다."

어느 날, 도반이 원불교 적십자 이야기를 꺼내는데 바로 따라가 가입하며 총무를 맡았다. 2년여 쯤 후에는 원봉공회에 가입해 부회장을 맡아 9년, 이어서 회장을 맡아 9년, 모두 합해서 20여 년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여고시절부터 봉사활동이라면 무조건 끌렸고 주위 인연에 도움이 필요한 곳이 유독 눈에 잘 띄었다. 

"전생에 갚아야할 업을 많이 지어놨구나 생각해요. 그러니 남의 일이란 하나도 없지요. 다 내 일이니 힘들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그가 부울교구 봉공회 책임을 맡은 기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해마다 단체상, 개인상 할 것 없이 꼭 상을 탔고 부산시자원봉사센터와 연계해 활발한 외부 활동도 벌였다. 현재 부울교구 봉공회가 하고 있는 활동들이 이때 탄탄한 반석에 많이 올려졌다. 특히 전국에서 유일하게 봉공회 자체 기관인 부산봉공센터 건립은 봉공회 활동에 날개를 달았다. 부산시장·행정자치부장관·국무총리상 등 굵직한 봉사상을 여러 차례 수상하고 특히 봉사자들의 꿈이라 할 수 있는 '아산상'까지 거머쥐었다. 

"가장 기쁜 상은 교정원장상입니다. 늘 교단에 한 일이 별로 없어 송구했는데 상으로 인정받았다 싶으니 뿌듯하고 감사했거든요."

4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부울교구 원봉공회는 이제 부산 지역사회에서 확실한 브랜드로 자리잡았고 그 뒤에는 수백명 회원들의 피땀이 녹아들어있다. "제 등 뒤에는 늘 봉공회가 붙어있습니다. 저는 개인이 아니고 단체이며 '나'는 없습니다. 저의 행동 하나하나에 무게가 있을 수 밖에 없어요."

부산울산교구 봉공회장을 맡고 있을 때 부산시장·행정자치부장관·국무총리상 등 굵직한 봉사상을 여러 차례 수상하고 특히 봉사자들의 꿈이라 할 수 있는 ‘아산상’까지 받았다.

50년 전, 그는 시이모(故 조기정 교도·숭산 박광전 종사 사돈)의 명에 따라 시어머니 종재식 날 영도교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열반 종재식 날에는 어차피 모든 가족이 모이니 그때 결혼식을 하는 것이 신정예법을 제정한 대종사님의 뜻에 맞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23살 신부는 모든 가족들이 어머니 열반을 슬퍼하며 눈물 바다를 이루던 날 결혼식장에서 처음으로 원불교를 만났다. 이후로 20년이 더 흘러 그를 본격적으로 교당으로 불러들인 건 '간절함'이었다. 

"경계가 은혜라고, 아들 대학 입시로 종교를 찾게 되더군요. 특별한 종교가 없어 결혼식 때 한 번 가봤던 교당을 방문해 원불교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어요. 교무님이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오라'는 말씀에 확꽂혀서 그 자리에서 입교했어요."

원기75년 그의 나이 44세 때다. 교무님의 권유에 따라 100일 기도를 올렸다. 매일 아침 혼자 교당에 나와 기도하다 마지막 날 교무님과 함께 기도 올리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구요. 일생에 흘릴 눈물은 다 흘린 것 같아요. 눈앞에 환영인지 실제인지 모르게 대종사님 진영이 선명하게 지나가면서 눈물이 감당이 안되더군요."

물론 아들은 합격했지만 그보다는 그에게 더 각인된 것은 '기도의 위력'이었다. 기도의 맛을 본 그에게 '무조건 기도'는 당연한 결론이었다. 조상들이 자주 꿈에 나타나 시끄러울 때는 조상 천도재를 올렸다. 지금은 수첩을 빽빽이 채워가며 매일 손자를 위해 기도한다. 

그는 오래 전에 봉공회장을 내려놓았지만 지금은 회원으로 변함없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봉공회 하면서 제가 많이 성장했어요. 집안에만 갇혀 일생 주부에 머물렀을지도 모를 저를 사회에 끌어내 줬고, 교구에 드나들며 법 높은 어른들 만나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내 인생의 가장 전성기는 봉공회 시절이었고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봉공회에서 받은 것, 이제 후진들에게 갚아 나가야할 때입니다."

[2019년 2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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