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지은 교무] 중생은 상대심으로 대상을 대한다. 좋은 것, 싫은 것, 마음에 드는 사람, 안드는 사람이 있다. 조금만 마음에서 벗어나도 분별심의 렌즈를 끼고 대상을 재단한다.

그 사람이 하는 행동 하나, 말 하나가 벌써 내가 낀 렌즈의 굴곡을 통해 들어오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내가 똑똑하고 옳아서 상대방을 분별하는 줄로 착각한다. 그 좁아진 마음을 한 평 넓혀 '그래, 저 사람이 그럴 만도 하겠구나', '내가 잘못하기도 했구나', '내가 부족했구나', 나아가 상대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 줄 수 있는 마음으로까지 돌리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성현을 가까이 하고 언행을 자주 접하는 것은 그 기운에 힘입어, 우리도 성현의 심법을 꾸어서라도 가져보자는 것이다. 성현의 마음에 접붙여서 우리 마음의 평수를 넓히고 넓히자는 것이다. 마치 가장 넓고 깊은 바다에 수많은 고기가 의지하고 사는 것과 같이, 깨달으신 성현의 큰 덕과 자비의 품에는 수많은 중생이 몸과 마음을 의지하여 안락한 생활을 한다.

'부처님의 대자대비는 저 태양보다 다습고 밝은 힘이 있나니'라는 불지품 법문처럼, 그 자비가 미치는 곳에는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이 녹아서 지혜로 변하며, 잔인한 마음이 녹아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변하여, 그 위력과 광명을 무엇으로도 가히 비유할 수 없다. 이것은 상대가 끊어진 절대, 무심, 지선의 자리라야 나올 수 있는 위력일 것이다. 나와 너, 옳은 것 그른 것을 따지는 이분법적 중생심에서는 나올 수 없는 힘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어떠했을까. 대종사는 '내가 재능으로는 남다른 손재주 하나 없고, 아는 것으로는 보통 학식도 충분하지 못하거늘 나같이 재능 없고 학식 없는 사람을 그대들은 무엇을 보아 믿고 따르는가'라고 했다. 그러나 대종사를 묘사한 〈대종경 선외록〉 실시위덕장 16절을 보면, "덕화와 위엄이 겸전하시어 멀리서 계시는 곳만 생각하여도 더운 기운이 돌았고, 한때라도 모시고 있으면 그 훈기에 추운 줄을 몰랐으며, 제자나 외인을 막론하고 조그마한 사심이라도 품고는 떨려서 감히 그 앞에 서지 못할 천지 정기(正氣)를 가지셨었다"고 전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만능(萬能), 만덕(萬德), 만지(萬智)의 여래이다. 오직 일체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지대한 서원일념으로 일관하며, 나와 너, 육도사생을 한 몸으로 아시며, 천지같이 간단 없는 정성을 행하며, 지공무사하고 동정이 한결같으며, 언행이 일치하고 복혜가 구족하며, 응용에 무념하며, 탐진치를 조복받아 자유자재의 만능을 얻은 분이다.

우리 중생의 눈으로 그 크신 부처님의 인격을 가히 다 더위잡을 수 없다. 조선의 궁벽한 시골에서 새회상 건설의 터를 닦으신 뜻을, 〈정전〉 전체에 담으신 큰 경륜을, 앞으로 올 세상을 내다보고 세운 그 큰 판을 어찌 다 알 수 있으랴.

그저 어찌 다행 잡은 이 문고리를 놓지 않기 위해 힘써야 하는 까닭이다. 세세생생 이 공부 이 사업을 놓지 않기로 서원을 굳게 세워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한 어른에게 신맥을 대고 공부한다는 것은, 그 분이 내신 법에 맥을 대고 닦아가는 것이다.

/미주총부법인

[2019년 2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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