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밀레의 <만종>에서 보듯이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기도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슬람 성전인 모스크에서는 하루 다섯 번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이 울려 퍼진다. 하늘의 음성인 아잔은 땅과 하늘을 진동시키며 저절로 무릎을 꿇게 한다. 동서의 성자들은 기도로써 하늘과 대화했다. 믿음의 끝은 깨달음이며, 깨달음의 처음은 기도다. 수행이 기도며, 기도가 수행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개혁을 이끈 루터는 "제화공이 신을 만들고, 재단사가 옷을 만드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직업은 기도"라고 한다. 

심고와 기도는 마음과 몸을 도구로 사용한다. 심고는 마음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이루어지며, 기도는 마음에서 시작해서 말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마음과 몸과 법신불이 삼위일체로써 승화된다. 심고와 기도가 하늘의 감응을 얻는 까닭은 원래의 우리 마음이 순진무구한 하늘마음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우리를 잉태하고 기르고 있으므로 마땅히 우리는 하늘과 같은 성품을 지녔다. 따라서 어떤 고난과 고통이 오더라도 하늘과 소통하면 응답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 하늘이 모든 만물의 근원인 법신불이다.

마음속에 법신불을 모시고 살며 늘 고하는 것이 심고다. 심고라는 말을 처음 쓴 동학에서는 시천주(侍天主)를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다. 하늘님을 모신다는 것은 안으로 신령함이 있고, 밖으로 기화(氣化, 하늘님과 접하는 것)가 있으며, 각자가 하늘님의 본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늘이요, 하늘이 사람이므로 심고는 성령을 마음과 몸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또한 하늘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성경신의 마음을 하나로 합하는 행위다. 

해월 최시형이 지은 <내수도문>에서는 "잘 때에 '잡니다'고 하고, 일어날 때에 '일어납니다'고 하고, 물 길러 갈 때에 '물 길러 갑니다'고 하고, 방아 찧으러 갈 때에 '방아 찧으러 갑니다'고 하고, 정하게 다 찧은 후에 '몇 말 몇 되 찧었더니 쌀 몇 말 몇 되 났습니다'고 하고, 쌀그릇에 넣을 때에 '쌀 몇 말 몇 되 넣습니다'고 하옵소서"라고 하늘님께 고하라고 한다. 또한 천지에 의해 화생된 곡식과 과일과 채소를 먹을 때에도 천지를 부모님처럼 생각하면서 감사하게 먹겠다는 식고(食告)의 이치를 확고히 알고 실천하면 도통이 그 가운데에 있다고 한다. 이는 수운 최제우가 그러했듯이 마음에 모셔진 하늘님을 깨닫는 길인 동시에 우주기운과 소통하는 길인 것이다.

이 세계는 법신불의 은혜로 충만 되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힘은 이 세계를 둘러싼 무한한 은혜 덕분이다. 은혜는 존재의 원천이다. 존재야말로 법신불의 무한덕상(無限德相)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로 살아갈지라도 존재의 근원인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심고와 기도는 무엇보다도 이 법신불의 은혜를 깊이 느끼며, 무한한 경외와 찬탄으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심고와 기도는 법신불을 내 안에 모시고 있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법신불의 자손이자 우리 형제인 모든 이웃의 행복을 기원하는 유형·무형의 의식이기도 하다. 올해는 목숨을 건 기도로써 법계로부터 이 회상을 인증 받은 법인성사 100주년의 해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기도는 우리 자신과 이 회상의 존재 근거이기 때문이다.

/원광대학교

[2019년 2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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