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도성 도무] 일상수행의 요법 1·2·3조와 관련된 법문으로는 〈대종경〉 수행품 1장을 비롯하여 '교의품 27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교의품 27장'에서 대종사는 이인의화 선진과 문답 하면서 '마음이 경계를 대하여 요란하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게 하나니라' 했다. 여기선 심지라 하지 않고 '마음'이라고 했고, '경계를 따라'가 아니고 '경계를 대하여'라고 했다. 심지를 넓은 의미의 마음(성품, 정신을 포함하는)과 같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계를 대하여'는 '경계를 따라'와 얼마나 다른가.

'천도품 27장'에도 비슷한 법문이 나온다. '정성과 정성을 다하여 항상 심지가 요란하지 않게 하며, 항상 심지가 어리석지 않게 하며, 항상 심지가 그르지 않게 하고 보면 그 힘으로 지옥 중생이라도 천도할 능력이' 생긴다고 했다. 이 법문에는 아예 '경계'라는 말이 빠져 있고, '원래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와 같은 다분히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구절 또한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항상'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이 말은 어떤 경계를 만나도 변함없이 심지가 요란하지도, 어리석지도, 그르지도 않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말하자면 경계를 초월하는 것이고, 경계 자체가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마음공부 방법을 설명할 때 지나치게 '경계'를 강조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경계를 따라'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일각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를 테면, 대상을 한 가지 관점으로만 규정지을 수 없음을 지적하기 위해, '원래는 이것도 저것도 없건마는(아니지만)', '경계 따라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한다', '경계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처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경계 따라' 그렇게 내가 달라진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도리어 정작 '나'를 규정짓는 주체는 '경계'이고, '나'는 다만 경계에 '딸린' 존재일 뿐인가.

정산종사의 다음 법문은 우리가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본래 선악 염정이 없는 우리 본성에서 범성과 선악의 분별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 본성에 소소영령한 영지가 있기 때문이니, 중생은 그 영지가 경계를 대하매 습관과 업력에 끌리어 종종의 망상이 나고, 부처는 영지로 경계를 비추되 항상 자성을 회광반조 하는지라 그 영지가 외경에 쏠리지 아니하고 오직 청정한 혜광이 앞에 나타나나니, 이것이 부처와 중생의 다른 점이니라.'(〈정산종사 법어〉 원리편 11장) 

경계를 대하면, 그 '경계에 따라서' 요란함이 있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의 '습관과 업력에 끌려서' 요란함(종종의 망상)이 있어진다는 걸 이 법문은 말해준다. '경계 따라'가 아니라 도리어 '(나의) 습관과 업력에 따라'로 봐야 한다. 

내가 그동안 익힌 습관과 지은 바 업력에 따라서 이러기도 저러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이 법문 중에도 '항상'이라는 말이 나온다. '천도품 27장'에서 말씀하신 '항상'과 같다. '항상 자성을 회광반조' 하는 것이 '항상 심지가 요란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은 경계를 초월하는 심력의 표현이며, 이것이 또한 부처와 중생의 '다른 점'이다.

/원경고등학교

[2019년 2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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