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임병학 교수] '제7 성리품' 3장에서는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큰 도는 원융(圓融)하여 유와 무가 둘이 아니요,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며, 생과 사가 둘이 아니요, 동과 정이 둘이 아니니, 둘 아닌 이 문에는 포함하지 아니한 바가 없나니라'"라고 해, 대도의 세계를 네 가지로 밝히고 있다.

대종사의 대도는 일원상 진리이며, 그 내용은 생멸 없는 진리와 인과 보응되는 진리인데, 여기서는 '유무(有無), 이사(理事), 생사(生死), 동정(動靜)이 둘이 아니다'라는 네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네 가지를 자세히 보면 유와 무, 이와 사, 생과 사, 동과 정 여덟 가지로 펼쳐지게 된다.

이는 〈주역〉의 학문적 체계와 여합부절하게 된다. '계사상' 제11장에서 논한 "역도에는 태극이 있고, 이것이 양의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으니, 팔괘가 길흉을 정한다(역유태극 시생양의 양의생사상 사상생팔괘 팔괘정길흉, 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 八卦定吉凶)"의 논리체계와 일치하고 있다.

<주역>에서 이 구절은 '역유태극'절이라 하고, 생성론적 입장에서 존재의 세계를 밝힌 것이자,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기본적 논리체계이다. 즉, '태극-양의(음양)-사상-팔괘'로 전개되는 논리체계는 동양철학을 이해하는 근본이 된다.

성리품 3장과 역유태극절을 대응시키면, 태극은 대도인 일원상의 진리이고, 양의는 음양으로 생멸 없는 진리와 인과 보응되는 진리이고, 불이(不二)인 네 가지는 사상과 만나고, 네 가지를 구성하는 여덟 가지는 팔괘(八卦)와 대응된다. 〈주역〉의 역유태극절이 대종사의 법으로 새롭게 해석되는 것이다. 

또 3장의 인용문에서 '둘 아닌 이 문'을 한자로 쓰면 '불이사문(不二斯門)'이 되고, 불이사문은 앞에서 네 가지의 불이(不二)함을 논하였기 때문에 불이사문(不二四門) 혹은 사문불이(四門不二)가 된다. 유학에서 사문(斯門)은 사문(斯文)으로 성인의 문이자 가르침이라는 뜻이 있다.

또 '큰 도는 … 이 문에는'는 대도사문(大道斯門)으로, 대도무문(大道無門)과 짝이 된다. 유와 무가 둘이 아니듯이 사문(斯門)과 무문(無門)이 둘이 아니다. 대도무문은 남송(南宋)의 선승 무문혜개(無門慧開)의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 서문에서 "큰 도에는 문이 없고 길은 천 갈래의 길이 있다. 이 관문을 뚫고 나가면 진리가 당당히 드러나리라.(대도무문 천차유로 투득차관 건곤독보, 大道無門 千差有路 透得此關 乾坤獨步)"라고 했다.

유학의 입장에서는 사문(斯門)으로, 선불교의 입장에서는 무문(無門)으로, 유무를 초월한 경계를 논하고 있다. 

불교는 사제(四諦)의 고(苦) 즉, 일체개고(一切皆苦)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무문이지만, 원불교는 모두가 은혜인 사은(四恩)에서 모든 가르침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대도사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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