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타원 유수일 대봉도

[원불교신문=정성헌 기자] "미주는 초타원 백상원 종사가 선구적으로 희생적으로 기반을 닦아놓으신 곳이지. 엄청 고생도 많았고 어려움도 있었는데 미국 교무들도 전무하던 시절이었지."

지난달 24일 있었던 미주교령 법장수여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이십여 년동안의 미주교화 초창기 시절을 회상하는 동타원 유수일 대봉도(81·東陀圓 柳秀日 大奉道). 그의 말에는 초창기 시절 남모르게 겪었던 고생보다 먼저 지나간 선진의 발자취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불모지였던 미주지역이 이제는 미주종법사 체제까지 갖출만한 시기가 도래했을 정도로 발전했다는 감사함이 묻어나왔다.

"교령제도는 대산종법사 시절 나왔던 제도지. 당시 미주 현지상황 형편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 그런데 이제는 교당도 많아졌고 교역자도 많아. 아직은 교령으로 발령났지만 미주종법사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해."

나도 고모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그는 전북 완주군 삼례읍 수계리에서 부친 유평석 선생과 모친 강진의화 여사의 11남매 중 3녀로 태어났는데, 독실한 원불교 집안이었다. 작은아버지(세산 유성택)는 수계교당 창립요인이면서 당시 교도회장(지부장)으로, 작은어머니(강타원 정만수)는 주무로 활발히 활동했었고, 이미 출가한 한타원 유장순 교무와 선타원 유성일 교무가 친고모였다.

"여러 형제 가운데 숙부 내외분이 원불교에 먼저 발심내셨지. 그래서 초창기에 교당도 세우고, 고모들이 교무한다고 하니까 좋아하시면서 학비도 다 대주고 그랬어. 지금 수계교당은 한국전쟁 이후에 신축했는데 당시 엄청나게 품위있게 지었지. 총부에서는 그것을 보존해야 한다면서 다른 건물 못짓게 하니까 벌써 70여 년이나 됐네."

그러나 원불교를 믿는다해서 고모들의 출가가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딸들이 시집은 안가고 독신으로 지낸다는 소리에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웠고, 큰아버지도 부끄러워서 동네사람들 못보겠다며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고모들은 집을 찾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수계교당이 자리를 잡고 건전한 종교활동을 펼쳐나가자 할머니와 큰아버지도 차차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돼 그가 15세 무렵부터 흰저고리 검정치마 입고 다니는 고모들을 만나게 된다.

"동네사람들이 '저 분들은 누군데 흰저고리 검정치마 입고 온다냐' 물으면, 내가 '고모여, 고모'라고 했지. 옆에 계시던 큰어머니, 작은어머니께 그랬지. '나도 저렇게 살았으면 좋겠네' 하고. 대꾸도 안하시데. 그러다 말았어."

그러던 어느날 그가 18살 되던 무렵 어머니가 열반하셨다. 갑자기 소중한 어머니를 잃은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점차 세상사에 흥미를 잃어갔다.

"내가 아버지께 '나도 고모처럼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지. 아버지는 '니 고모들은 작은아버지가 학비도 대주고 했는데, 너는 오빠도 없고, 나도 죽어버리면 누가 니 뒤를 봐줄거냐. 안된다' 그러셔."

다급해진 그는 고모인 유장순 교무에게 도움을 청했다. 조카가 출가한다니 기분이 좋았던 고모는 결국 오빠를 설득해 허락을 얻었다.

정성만 들이면 다 되는 것이다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원기49년 원광대학교 경리과에서 6년, 원기56년 산서교당에서 3년 근무를 마칠 즈음이다. "어느날 백상원 교무가 같이 미국가자고 하시는거야. 나는 절대 못간다고 했지. 그랬더니 아타원 전팔근 종사를 모시고 왔어. 그때는 우리가 어른이 말씀하시면, 가서 못살고 들어올망정 못한다는 소리는 못할 때라 꼼짝 못하고 간거지."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가게 된 그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영어라고는 전혀 할줄도 모르고, 미국교화도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산종법사를 찾아 뵙고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영어를 합니까,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까. 정말 못 가겠어요"라며 하소연을 풀어놨다. 그러자 "정성만 들여라. 정성만 들이면 다 되는 것이다"는 대산종법사의 법문에 깊은 울림을 느꼈다.

"그 말씀을 듣고 지금까지도 항상 '그래 무슨 일이든 내가 정성만 다 들이면 되지. 정성들이지 않고 되는 일이 뭐가 있느냐'고 새기며 살았다. 지금도 내 가슴 속에 말씀이 있어."

법있고 경륜있는 어른이 계셔야
그는 처음으로 해외교화에 나섰지만 어른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법있고 경륜있는 어른이 계셔야 교포 교화가 가능해지고, 젊은 교무는 본토인 교화에 도전해야 한다고 내다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타원 서세인 교무를 모시고 가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대산종법사를 다시 찾아 "은타원을 꼭 모시고 가고 싶어요" 라고 말씀올리니, "내가 대종사님, 정산종사님하고 의논해서 답을 줄테니까 다음에 다시와라"고 했다. 이틀 뒤 다시 찾아뵙자 "모시고 가라"는 하명을 받들어 서세인 교무를 10년동안 미주교구장으로 모시고 살았다.

"나는 지금도 미주교화는 연륜있는 분과 젊은 사람으로 팀이 구성돼야 한다고 봐. 우리 세대들이 살다가 부교무를 데려온 이들도 있었는데, 그때 학교 보내고 공부시켜놓으니까 지금 본토인 교화를 하고 있잖아. 그때는 힘들고 어려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초창에 그렇게 해놓기를 잘했다는 보람이 들어."

교도 확보가 어려운 시절
그는 원기63년 LA교당, 원기67년 시카고교당, 원기79년 뉴욕교당을 거치며 어려운 미주교화 초창기를 일궜다. 가장 어려운 일은 LA에서도 뉴욕에서도 교도 확보였다. 미국은 최고 부강국이었고, 당시 교포들은 이민 1세들로 사는 것이 모두 힘들 때였다. 게다가 개신교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교포들 사이에 다른 종교를 신앙한다고 하면, 한인사회에서 그 교포가 운영하는 가게 물건에 대한 불매운동에 일어나는 등 생계위협까지 받았다. 때문에 경제적으로 힘든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교도 하나가 온다고 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어. LA교당에 전화와서 원불교 가고 싶은데 어떻게 찾아가면 되냐는 소리를 듣고 단숨에 마중나가기도 했고, 시카고교당에 있을 때에도 원불교 간판보고 찾아온 분도 있었는데 처가 식구들이 모두 원불교를 믿었나봐. 그런 때가 가장 기뻤고, 이런 기쁨이 있으니까 교화를 하나보다 생각이 들었지."

Good Job 이라는 칭찬
생전 처음 겪게되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그의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LA교당에 근무하면서 교도가 운영하는 햄버거 가게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조그마한 햄버거 가게에는 그와 유학생이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아 넘기면 주인인 교도가 햄버거를 만들었다. 당시 햄버거 가게들은 담배도 함께 팔았다. 수십종의 담배를 현지인들이 찾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그는 제일 잘팔리는 담배 10종 이름을 외워가며 적응했다.

시카고교당에서는 청소부로 나서기도 했다. 경제적 이유보다 미국인들의 생활을 알기 위해서였는데 교도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모두 직장생활을 하기 때문에 일주일 1~2번 가정 청소부를 고용해 집을 청소하는데 처음 소개해 준 곳은 집이 너무나도 커서 정해진 6시간에 다 마치지 못해 해고당하기도 했다. 딱한 사정이라고 생각한 교포 중개인은 다시 적당한 크기의 집을 소개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다보니 집주인에게 "Good Job!"이라는 칭찬도 받고, 어느 집에서는 맛있는 점심을 대접받기도 했으며, 가는 곳마다 계속 일해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6개월 즈음 지나면 그만두고 다른 집을 찾았다.

미주교화 초석을 다지다
그는 교당생활이 어려워 김치장사를 비롯해 공항을 내왕하는 운전수, 임산부 보호자, 병원안내자, 버스파업 때문에 출근못하는 교도들 운전도 마다하지 않으며 모두 교도 만나는 기회라 여기고 기쁨으로 임했다.

LA교당에서는 교포사회의 번영회장이었던 임향근 박사를 만나 교도들과 LA지역 거리청소를 하게 된 기연으로 시의원 감사장을 받아 원불교를 알릴 수 있었고, 시카고교당에서는 신산 김양수 회장과 혜타원 진인천·성타원 진인석 주무들을 만나 새법당을 마련하기도 했다. 

뉴욕교당에서는 교구 합동봉불식(시카고, 필라델피아, 워싱톤교당), 좌산종법사 내방 대법회, 교구 교무훈련, 한국학교 운영, 불교방송 방송설교 등 바쁜 일정 속에 미주교화 초석을 다졌다. 그는 미국교화를 마치고 귀국해 원기84년 금마교당 근무, 원기89년 마령교당 자원봉사를 끝으로 원기91년 퇴임하며 대봉도를 수훈했다.

창립정신과 사무여한으로
"우리 선진들도 창립정신으로 방언공사하셨고, 초창기 학비 벌기 위해서 공장에 다니셨어. 내가 어려운 일 당하면 '우리 선진들도 공장에 가서 일하시고 그랬는데 내가 이것을 못하랴'하면서 위안을 많이 얻었지. 한번씩 한국에 들어와 융타원 김영신 선생께 인사드리면 '아이고 얼마나 고생했느냐' 그러시면 '선생님 저희는 그래도 맛있는 거 먹고 자가용 타고 다녀요. 선진님들은 고생하시면서 맛난 것 잡수시지도 못하고 그러셨잖아요. 우리는 고생도 아니에요' 이렇게 말씀드렸는데 그 정신이야. 우리 교단도 그 정신으로 이뤄졌고, 해외교화도 그 정신으로 이뤄졌어. 사무여한 정신 항상 마음 속에 새기고 살아야 해."

[2019년 2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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