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치심 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원불교신문=오덕진 교무] 소태산 대종사께서 가르쳐주신 마음을 사용하는 방법은 각자의 근기와 경우에 따라 각각 그에 맞는 법으로 마음 기틀을 계발하는 공부입니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내 마음으로 공부하고 일일이 문답하고 지도인에게 감정과 해오를 얻으며, 내 삶을 산 경전과 큰 경전으로 삼는 공부이기에 대종사께서는 우리의 공부는 맞춤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공부인: 우리 집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데 아빠가 일을 그만두셨어요. 아빠가 무책임한 것 같고, 제가 경제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아 부담이 커요. 그런데 아빠는 너무 해맑아서 꼴 보기 싫어요. 제가 투명인간 취급해도 계속 말 걸고.
▶지도인: 이것이 가족이냐 생각이 들 때마다 '이것이 가족이구나!' 알아차려야 합니다. 한 공부인이 우리 형제는 이혼한 사람도 있고 자살한 사람도 있다고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할 말이 없다. '이것이 가족이구나!' 밖에"라고 말하고는 같이 웃었습니다.
40세를 불혹(不惑)이라고 합니다. 미혹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미혹이 엄청 많아서 그것으로 공부하면서 힘을 쌓는 것입니다. 40대가 되면 아이들은 사춘기지, 부부 사이에는 회의가 생기지, 부모님은 아프시고 떠나기 시작합니다. 자기 인생에서 아무 의미를 찾지 못하고 힘들 때입니다. 그런 시절을 좋다, 나쁘다고 하기 이전에 에너지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장이라는 명분 아래 꼼짝 못 하고 사는 사람이 많은데 아버님의 에너지가 대단합니다.

▷공부인: 하지만 아빠잖아요. 저는 아직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고 동생도 아직 고등학생이에요. 어떻게 가정을 돌보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살 수 있어요. 
▶지도인: 아버지가 가장의 책임을 다하지 않으니까 진로 고민도 힘든데 장녀로서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부담을 느끼겠네요.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에게 원망심이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 공부인의 말을 들으니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있지만, 아버지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무시할 때 미안해하는 마음도 느껴지네요. 아버지에게 정말 좋은 딸이 되고 싶은데 아버지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나쁜 딸인 자신이 싫고, 나쁜 딸로 만들어버린 아버지가 더 미워지는 거죠. ○○ 공부인은 어느 때는 좋은 딸이지만, 어느 때는 나쁜 딸, 어느 때는 이상한 딸이기도 합니다. ○○ 공부인이 나쁜 딸, 이상한 딸이기도 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아빠도 나쁜 아빠, 이상한 아빠일 수 있다는 것이 이해됩니다. 

▷공부인: 단장님 말씀처럼 아빠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제가 싫어요. 하지만 미움이 너무 커서 괜찮은 척 할 수 없어요. 아빠에게 화가 나니까요. 
▶지도인: 아버지가 이해된다는 말에 속지 마세요. 아버지를 비난하는 마음이 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는 마음'과 '내는 마음'은 다릅니다. 밉고, 예쁘고, 화나고, 짜증나고, 즐겁고. 마음은 경계 따라 변화무쌍하고 다양하게 일어납니다. 이것이 '나는 마음'입니다. '내는 마음'은 내 의지로 내는 마음입니다. 미운 마음을 내고, 예쁜 마음을 내고, 짜증을 내고. 동서고금의 모든 성인이 아만심·탐심·진심·치심을 내지 말라고 했지, 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보조국사 지눌은 〈수심결〉에서 '성품은 작용하는 데 있다'라고 했고,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고 깨침이 더딤을 걱정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돌이나 나무처럼 아무런 마음 작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마음 작용이 있어집니다. 
그래서 경계를 대할 때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나 전제로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빠를 미워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전제죠. 그 '나는 마음',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에 끌리는지 안 끌리는지 잘 살피는 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깨어있으면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상황이나 자신의 순간적인 마음이나 상대방의 겉모습에 속지 않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공부인: 원래는 아빠가 좋다, 밉다는 분별이 없건마는 아빠가 일을 그만둔 경계를 따라 아빠가 밉다는 분별이 있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겠네요. 그 마음이 나올 때마다요.
▶지도인: 맞아요. 그 묘한 마음이 그 없는 자리에서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난 것이고, 선악 업보에 차별에 생겨난 것이고, 언어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난 거예요. 그 마음의 묘한 작용을 믿는 것이 일원상의 신앙입니다.

/교화훈련부

[2019년 2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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