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보고 즐기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 된다면
조금 더 유연하고 너그러운 사회 될 것

[원불교신문=허경진 교도] 우리나라의 공연문화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궁중에서는 궁중음악과 그 음악에 맞는 무용이 발달하여 연회에서 선보여졌다. 양반가에서는 정가라고 하여 시조에 선율을 붙여 느리게 부르는 성악곡과 정악곡으로 연주하는 기악곡들이 있었다. 일반 평민들 사이에서 즐기는 공연은 시장이나 저잣거리에서 열리는 남사당놀이나 풍년을 기원하는 농악, 재미있는 이야기를 북장단에 맞추어 소리와 아니리로 풀어가는 판소리가 있으며 주로 마당놀이의 형태로 이뤄졌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원각사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 생기면서 창극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창극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1인 다역으로 혼자 노래하던 판소리를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모두 등장시켜 연극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풀어낸 것이다. 서양의 오페라나 현대의 뮤지컬과 비슷한 국악의 장르이다. 

뭔가 현대의 공연에 가까운 형태가 되어 진다. 그 이후에도 공연문화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끊임없이 발달하고 있다. 장르의 다양성, 그 다양해진 장르들의 융합과 변화, 공연의 규모, 장소, 시간 등 여러 변주들을 해가며 그렇게 발전해 왔다. 

공연을 만들어 선보이는 전문연주자들이나 그 공연을 보는 관객들이나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고 폭소하기도 했을 것이다. 특히 관객들은 공연을 보는 동안은 세상사 시름을 잠시 내려놓고 몰입하게 된다. 관객에게 공연은 고단하거나 또는 무료한 삶에 단비이다. 공연을 통해 조금 더 삶을 긍정하고 풍요로워짐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의 끄트머리에서 문득 '내 주위의 사람들이 평소에 얼마나 공연을 접하며 살아가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이라는 편리하고도 재미있는 매체를 통해 공연 비슷한 것을 즐기는 것이 대부분이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직접 공연장을 찾아 연주자들이 혹은 배우들이 피 땀 흘려가며 만든 소중한 작품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고 관람할 만큼의 관심과 여유가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를 생각하니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다.

우리나라의 예술 수준이나 공연문화는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연주자들이나 예술가들이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고 그 연장선으로 다른 나라의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우리나라를 많이 찾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들이 설 수 있는 훌륭한 공연장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에 비해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의 비율은 전체 인구를 생각했을 때는 낮은 것이 사실이다. 

지난 1월에 여러 공연장에서 상반기 또는 올해 주요 공연스케줄이 발표됐고 티켓오픈을 했다. 나는 새로 장만한 다이어리에 가족들 생일 다음으로 1년치 공연 스케줄을 적어 넣었다. 다 적고 보니 그 옛날 어머니께서 쌀독을 채웠을 때의 마음처럼 푸근해 졌다. 

일상사에 지쳤을 때 기다리던 공연을 보는 순간은 내 정신의 힘을 충전하는 시간이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문화를 즐기는 것이 간접적 체험이라면 직접 공연장을 찾아 무대의 작품을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직접적 체험이다. 

주변에 좋은 공연이 너무나 많은데 객석이 거의 비어있거나 그러다 소멸되고 마는 현상들을 볼 때면 아마존의 숲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처럼 허무하고 안타깝다. 

공연을 보고 즐기는 것이 보편적인 문화가 된다면 조금 더 유연하고 너그러운 사회가 될 것이다. 한권의 책을 읽고 한편의 영화를 보듯이 공연장을 찾아 정성껏 준비한 만찬을 즐기듯 공연문화를 즐기는 것이 누구나에게 쉬워진다면 참 좋을 것 같다. 특히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좋은 공연을 경험하는 것은 정서에 좋은 보약 한재를 먹이는 것과 다름없다. 

올해는 공연장을 찾아 좋은 공연을 관람하며 공연문화도 발전시키고 나도 발전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강북교당

[2019년 2월15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