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임병학 교수] 성리품 3장에서 말씀한 불이사문(不二四門)에서 문을 〈주역〉에서는 "천지가 자리를 베풀거든 진리가 그 가운데에서 행해지니, 본성을 보존하고 보존하는 것이 도의(道義)의 문이다(천지설위 이역행호기중의 성성존존 도의지문, 天地設位 而易行乎其中矣 成性存存 道義之門)"이라 해, 도의지문(道義之門)을 밝히고, 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건곤은 그 진리의 문이구나!(자왈건곤 기역지문야, 子曰乾坤 其易之門邪)"라고 해, 역지문(易之門)이라 하였다. 문은 마음의 문이고, 진리의 문이다.

3장의 네 가지 가운데 유무를 〈주역〉으로 만나보면, 먼저 '유와 무가 둘이 아니요'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으로, 있다고 해도 되고 없다고 해도 되며, 있다고 해도 안 되고 없다고 해도 안 되는 것이다. 

유와 무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으로 둘이 아닌 원리와 둘로 논하는 세계를 생각하게 된다.

〈주역〉에서 유는 '존재'나 '있음'의 독일어 sein이나 영어 being의 의미도 있지만, '또 유'로 사용되고 있다. '있음은 또 있다'로, 현상에 있는 것은 먼저 뜻(원리)이 있기 때문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뜻이 있음은 있기는 있는데 뭐라할 수 없으니 없다고 할 수 있고, 현상에 존재하는 것은 있는 것이니, 유에 무유의 의미가 동시에 들어 있다.  

무(無)는 〈주역〉에서 무(无)로 쓰고 있다. 무(无)는 천(天)에서 오른쪽 삐침이 드러나는 작용으로, 하늘의 작용을 상징한다. 즉, 무도 본체인 하늘 천은 무엇이라 말할 수 없지만, 그 하늘이 작용하는 것은 현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주역〉에서는 무를 말할 때에도 '무유원근유심(无有遠近幽深)', '무유사보(无有師保)' 등 유와 함께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무에도 무유의 뜻이 동시에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주역〉의 학문적 논리에서 유와 무는 태극과 무극으로 대응된다. 무극은 하늘의 본체적 입장으로 무라면, 태극은 하늘의 작용적 입장으로 유라고 하겠다. 

변의품 23장에서는 "주역의 무극과 태극이 곧 허무적멸의 진경이요, 공자의 인이 곧 사욕이 없는 허무적멸의 자리요, 자사의 미발지중(未發之中)이 허무적멸이 아니면 적연 부동한 중(中)이 될 수 없고, 대학의 명명덕이 허무적멸이 아니면 명덕을 밝힐 수 없는 바라"라고 해, 무극과 태극을 체용의 이치로 밝히고 있다. 

유무의 한자를 〈주역〉으로 풀면, 유는 일(一)과 삐침 별(다스리다), 월(月, 음양의 이치)로, 일태극(一太極)이 작용하는 음양의 이치를 다스린다는 것이고, 무(無)는 누운 사람 인(人, 진리에 편안한 사람)과 두 이(二, 음양), 곤(ㅣ) 4개, 불 화(火, 사상(四象))로, 성인의 마음속에서 밝혀진 천도(天道)의 음양, 사상원리이다. 

유(有)는 땅의 이치인 일(一)이 위주이고, 무는 하늘의 원리인 사상(四象)이 위주로 건곤(乾坤)·음양을 담고 있다. 

/원광대학교·도안교당

[2019년 2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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