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원익선 교무] 불공은 부처님께 향·꽃·등·차·과일 등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 성자의 열반 후, 후인들이 그를 존중하는 마음을 이렇게라도 표현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제사처럼 소중한 물품을 올리는 이 행위에 어느 사이 개인의 소원이 가미됐다. 죽음을 비롯해 내일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상황을 돌파할 수 있도록 간절히 비는 것 또한 종교적으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불공의 대상인 불상은 하루아침에 발생하지 않았다. 불멸 후, 제자들은 부처님이 너무나 위대했기 때문에 초상화나 조상(彫像)을 감히 제작하지 못했다. 또 다른 이유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신이나 조물주를 상정하여 경배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4제8정도의 가르침처럼 자연적이며 철학적인 방식으로 인간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열반 직전, "자신에게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고 설한 것에서 보듯이 어떤 외재적인 대상을 추앙하도록 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처님의 유골을 모신 스투파(탑)는 부처님을 예배하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그 외에도 부처님의 일생을 그린 불전도(佛傳圖), 부처님을 상징하는 법륜, 불족석, 보리수, 대좌 등이 예배의 대상이 됐다. 그러다가 인도 서북지역인 간다라(파키스탄 페샤와르 주변의 옛 지명)에 불멸 후 6세기가 지난 서기 1~2세기 무렵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간다라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대왕의 침입 후 동서문화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불상 또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거의 동시에 인도 북부의 마투라(우타르프라데시주의 도시)에서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고대 인도의 경제적 중심지였으며, 인도신화에 등장하는 비슈누의 화신인 크리슈나의 탄생지로도 알려져 있다. 아마도 불교의 발전을 추동했던 상인들의 후원으로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 간다라 불상은 그리스 신상과 닮았으나 마투라 불상은 인도 고유의 특색이 짙다. 

불상이 만들어진 과정은 이처럼 문화나 사회 환경과 깊은 관계가 있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인간의 종교적 심성이다. 대승불교에서 정토사상이 발전하여 초기불교에서는 볼 수 없는 내세정토에 대한 신앙이 발생하였듯이, 불상 또한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성자들을 형상으로 재현함으로써 그 위력을 받고자 하는 갈망 때문에 등장했다. 즉 위대한 존재에 의탁함으로써 고통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의 안심과 안정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조상들이 후손을 보살펴주고 있다는 민속적인 소박한 관념과도 연동된다.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을 기리고 받들기 위해 초상화나 동상을 제작하는 이유와도 통한다.

불교가 발전하면서 불상은 다양해졌다.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약사여래, 미륵불 등 많은 부처가 등장했다. 여기에 관음, 문수, 보현, 지장 등 수많은 보살의 상이 더해졌다. 또한 범천, 제석천, 사천왕, 나한, 산신 등의 여타의 상들도 모시기 시작했다. 이들 모두를 넓은 의미에서 불상으로 볼 수 있다. 사찰에서는 불보살단, 호법신중단, 산신단·칠성단 등으로 나누어 각각 상단, 중단, 하단불공을 올린다. 수많은 불상에 대해 불공의 방식도 다양해진 것이다.

/원광대학교

[2019년 2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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