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아무렇게나 이용하고, 죽이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제 동물을 물건으로 보는 시대는 지났다

[원불교신문=채일연] 배두나, 톰 행크스 등이 출연하고, 워쇼스키 자매가 연출은 맡은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년 작)라는 옴니버스 영화가 있다. 윤회사상을 기반으로 이어지는 6개의 스토리는 각각의 차별과 편견, 억압에 맞서며 인간으로서의 내재적 가치를 회복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중 다섯 번째 이야기는 2144년 미래의 네오 서울(NEO SEOUL)을 배경으로 복제인간 '선미-451'(배두나 분)이 자신 또한 인간과 같이 감정을 느끼고 사고하는 존재임을 깨닫고 생명체인 복제인간을 착취하는 인간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영화에서 복제인간들은 인간들의 성희롱에도 반항해서는 안 되며, 같은 복제인간의 사체로 만들어진 비누를 먹고 생활한다. 또 일정기간 이용되고 나면 죽임을 당하고 비누로 재생산된다. 지극히 비인간적인 내용인지라 영화 속 상상에나 있을 법한 일들이 사실은 현실 세계에도 존재하고 있다. 인간에 의해 이용되는 가축들, 특히 공장식 축산으로 사육되는 가축의 삶은 영화 속 복제인간들의 삶과 똑 닮아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편익을 위해 동물을 마음대로 이용해도 되는 것일까?

과거 많은 서양철학자들은 동물은 인간과 달리 영혼이 없으며, 쾌고감수능력과 이성이 없다고 보았다. 대표적으로 데카르트는 동물을 영혼과 정신, 이성이 없는 복잡한 기계장치로 동물이 느끼는 고통 역시 인간과 달리 그저 기계적 반응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폈다.

반면 20세기 현대철학자들은 동물도 인간과 같이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며, 인간이 동물의 위계를 정하고 비인간동물을 억압하거나 이용하는 것에 대해 종차별 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들은 인간만이 갖고 있다고 믿는 합리성과 도덕성을 근거로 동물을 차별하게 된다면 식물인간이나 지적장애인 등 합리성과 도덕성을 확인하기 힘든 '가장자리 인간', 혹은 '경계인간'에 대한 차별 역시 정당한 것이 되므로, 이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에 대한 차별이 됨을 설명하며, 동물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동물에 대한 윤리적 책임에 대한 해석이 모두 동일한 것은 아니다. 동물을 이용은 하되, 그에 따른 인도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주장(동물복지주의)부터 동물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쾌고감수능력과 자신의 환경에 대해 좋고 나쁨을 인식할 수 있는 인지능력이 있으므로 인간과 마찬가지로 평등원리를 동물에게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동물권)을 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동물권을 지향하되, 현재 동물들의 고통을 감소시키는 동물복지적 조치를 취해나가는 '신동물복지주의'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최근 우리사회에서도 많은 시민들이 동물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동물의 복지를 신장시키고, 동물권을 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의 법체계에서 동물은 물건과 같이 취급당하고 있으며, 수많은 동물학대 사건이 이어짐에도 지난해 서울고법에서는 "우리 법은 주인이 자신이 소유한 동물을 죽이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동시에 자신이 운영하던 펫샵의 개 79마리를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에 대해서는 지난 2월14일 대전고등법원은 피의자의 항소에도 불구하고,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200시간을 명령한 원심을 그대로 유지했다. 또한 판사는 "이제 동물을 물건으로 보는 시대는 지났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동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그 책임에는 소홀하도록 한 법체계와 이에 분노하고 변화를 요구한 시민들, 시민인식의 변화를 반영한 판결 등 우리사회에 여러 층으로 존재하는 동물에 대한 시선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동물을 도구와 이용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제도가 존재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인식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점이다.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은 "같은 생명체인 동물을 아무렇게나 이용하고, 죽이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라고 깜짝 놀랄지도 모를 일이다.

/여의도교당

[2019년 2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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