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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법의 삶] "우리는 행복자, 미워하지 말고 다 용서하자"
[호법의 삶] "우리는 행복자, 미워하지 말고 다 용서하자"
  • 안세명
  • 승인 2019.02.26
  • 호수 1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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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산 고문기 종사
감산 고문기 종사는 형식과 이름을 내세우지 말고 스스로 책임을 다하는 주인으로서 거듭날 것을 서원한다.
감산 고문기 종사는 형식과 이름을 내세우지 말고 스스로 책임을 다하는 주인으로서 거듭날 것을 서원한다.

[원불교신문=안세명] 금년 2월부로 ㈜일정실업 명예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감산 고문기 종사(鑑山 高文起·91세). 

요즘 고 원로교도에게 가장 큰 화두는 "어떻게 하면 잘 갈 것인가"이다. 15년 전 준비했던 영정사진도 다시 찍으려 한다. 모든 생활의 목적이 '아름다운 정리'인 그는 내가 미워했던 사람, 서로 원망하는 마음이 없도록 몇 년 전부터 일일이 화해를 했다. "모든 일에는 큰 테두리 속에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행복하고 재미있다"는 그의 인생철학은 '여일한 서원'이다.

'우리 모두 한 가족', 행복공동체
고 원로교도의 일생은 매 순간 목적을 설정하고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정제된 삶이었다. 40년 전, 대한민국의 경제는 참으로 열악했다. 외화가 없어서 독일로 광부의 길을 떠나는 나라의 현실을 보면서 그는 "달러를 버는 것이 나라에 이익이 되겠다" 싶었다. 제조업 분야에 문외한이었던 그는 섬유산업에 관심을 갖게 됐고, 양말과 스웨터 기술을 전수, 노력한 결과 1988년, 천만불 수출탑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후 그는 "수출만 할 것이 아니다. 고용을 많이 해서 많은 사람을 먹여 살려야겠다"는 또 하나의 목적이 생겼다. 제 1공장에서 제 3공장까지 세우며 직원들도 500여명으로 늘어났고 부양가족도 2500명에 이르렀다. 함께 일하는 근로자들이 고맙고 한 식구 같았다. 그래서 사훈을 '우리 모두 한 가족'으로 정하고 그 정신을 직원들에게 알렸다. 한 가족으로서 서로 책임지고, 한 가족으로서 즐겁게 번영해 가자는 뜻이었다.

기업환경이 바뀌면서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노사갈등으로 시끄럽지 않은 회사가 없었다. 그러나 일정실업은 사장을 '노조위원장'이라 부를 정도로 합심하고 단결했다. 그는 "직원들이 나를 믿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보람이자 행복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말한다. "원불교 공부 안했으면 더 큰 기업을 키웠을 것이예요. 나는 경쟁을 하고 싶지 않았거든. 내가 이기면 상대가 망하기 때문에 욕심을 버리고 또 버렸죠."

나의 어머니, 예타원 김성덕 법사
〈한울안 한이치에〉에는 70쯤 돼 보이는 여성 한 분이 정산종사께 이마를 장판에 대고 지극히 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철학가 안병욱 교수가 이 광경을 보고 "나는 평생에 그렇게 공경스러운 인사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것은 정성 그 자체요, 공경 그것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본 인사 중에서 가장 경건한 인사였다"고 말한다. 그 여성이 바로 고 원로교도의 어머니인 예타원 김성덕 교도이다. 어머니는 그가 원불교와 인연 맺게 한 신앙의 근원이었다.

"어머니는 참으로 너그러우셨고, 다 용서하시는 대장부셨어요." 고 원로교도는 고된 시집살이 속에서도 시동생 둘과 5남매를 키우고, 평생 부친의 약탕을 수발하며 집안을 건사했던 모친의 불굴의 의지를 떠올렸다. 그는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고 편안하게 봉양하지 못했다는 마음에 죄송한 마음이 크다"고 참회했다. 

그의 모친은 박사시화 선진의 인도로 총부에서 대종사를 뵙고 원불교에 귀의했다. 그는 "어머니는 원불교를 만난 뒤로는 일체 원망을 놓고 모든 것이 내 운명이다, 다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며 온갖 어려움을 감사로 이겨냈음을 말했다. 그는 "어머니는 크게 한숨을 쉬며, '내가 이 공부를 안했더라면 어떻게 살았을지 모르겠다. 이 법으로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평생 이야기했다"며 "어린 내 마음에도 원불교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종교임이 새겨졌다. 어머니 힘으로 원불교는 자연히 내 종교가 됐다"고 몸소 실천하는 것이 자녀들에게 일원대도를 대물림하는 방법임을 말했다. 이러한 원력으로 그의 아들 고영학·며느리 김영천 교도는 대치교당에, 딸인 고영심·사위 민경천 교도는 강남교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쓴 소리 많이 했지만, 격려하고 싶다 
고 원로교도는 이선종 원로교무의 호탕함에 반해 정릉교당을 다니게 됐고, 이 원로교무는 원불교를 잘 모르는 그에게 교도회장직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총부에서 발부된 회장 사령장을 받고나니, '하려면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6년간 법회에 빠지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골프도 끊고 출장도 일요일은 피했다. 친구들 사이에는 '원불교랑 결혼했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교당 다니는 희열로 더 건강해지고, 마음도 살아났다.

교당 생활에도 목적이 필요했다. 당시 출석교도가 20여명이고 유지금도 한달에 20만원이 채 못 됐다. 밥도 못 먹을 형편이었다. 교도회장으로 교당 살림에 신경 쓸 입장이라 마이크를 잡고 설득해도 호응이 적어 단별 유지금 그래프를 그려 경쟁을 시키니, 유지금도 3배로 늘어나고 교무 용금도 해결됐다. 지금 같으면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젊어서 그런지 용기가 났다. 이후 서울동부교의회의장, 중앙교의회의장, 육영사업회장, 원경영인회장, 감로교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그는 언제나 해결사로 나섰다. 특히 육영사업회는 예비교역자들의 학자금을 도와줘야 하는데 그 역할을 못하고 있었다. 송순봉 교육부장과 호흡도 잘 맞고 많이 돕고 싶었다. 9년간 운영하면서 사업회 기반을 튼실히 했다. 그는 언제나 목적을 세우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승부했다.

중앙교의회의장 시절에는 〈교헌〉 개정이 큰 과제였다. 개정의 골자는 '상사제도'를 두는 것과 '미주총부'를 둔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많은 분들이 반대했고 공청회도 열리고 굉장히 시끄러웠다. 책임론을 운운하며 기명투표까지 거론됐다. 그는 기명투표의 후유증이 크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상기시키고 다수결로 결정할 것을 설득했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다.

또한 그는 교단을 향한 쓴 소리를 아끼지 않기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쓴 소리는 중앙중도훈련원에서 재가교도로서 교무에게 바라는 강의였다. 마침 인사이동 후 1달이 지난 시기였기에 그는 "우리가 가슴에 손을 대고 생각해보자. 대종사께 한 점 부끄럽지 않은 교역자인가 반성해보자. 교당에서는 교도들에게 공감이 가는 설법을 하는데, 교역자들의 행동은 여합하지 않은 것이 많다"며 "인사의 제일 중요한 원칙은 '지자본위'가 근본정신이 돼야 한다. 끈이 있는 사람은 중앙에 오고 끈이 없는 사람은 한지로 뱅뱅 돈다. 원불교에서는 그러면 안된다"고 인사행정의 정도(正道)를 강조했다.

고 원로교도는 "전산종법사께서 '새롭게'를 선언했는데, 이중 제일 중요한 것은 '교단을 새롭게'다. 누가 교단을 새롭게 할 것인가 교단의 지도부부터 새 마음으로 관행을 고쳐야 한다"며 재가출가가 서로 깊이 존숭하고 합력해갈 것을 주문했다. 그는 "요즘에는 어려운 교당에서 고생하는 교무들이 너무 많아 미안하고 죄송하다. 쓴 소리 보다는 위로와 격려를 하고 싶다"며 "1년이면 한 번씩 단체나 어려운 교당에 힘이 되고 싶어서 기금을 조금씩 보내고 있다. 해외교화를 위한 개척에도 동참하겠다"고 식지 않은 애정을 전했다.

감산장학회 1862명에게 혜택
고 원로교도가 70세 되던 생일 날, 육영사업회에 공을 들였지만, 보다 많은 이들에게 장학 혜택을 주고자 감산장학회를 설립했다. 그는 "공부 잘하는 학생보다 사상이 건실하고 장래성은 있는데 가정이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었다"며 2000년부터 19년간 고등학생 1,031명, 대학생 831명에게 50억  6천300만원의 기금을 전달했음을 밝혔다. 이중 50%는 전무출신 자녀들에게 혜택이 돌아갔으니, 결국 육영사업회와 동업이다. 

지금도 그의 집무실에는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로부터 감사편지가 배달되고 있다. 그는 "대부분 학생들이 '나도 성장하면 장학사업을 하고 싶다'며 감산장학회를 통해 기부와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이 또한 은혜확산이다"고 보람을 전했다.

인과품 봉독하며, 내생은 전무출신의 길
고 원로교도의 마지막 목적은 '90여 년의 삶을 어떻게 깨끗이 정리할 것인가'이다. 그는 "나의 일생은 참 행복했다. 운이 참 좋았다. 내 노력과 실력에 비해 너무 큰 대우를 받았다"며 "회사 운영도 기술과 경영능력이 부족했음에도 좋은 인연들을 만나 잘 풀렸다. 교단에서도 모든 교무들과 교도들과 함께 어려운 일들을 잘 풀어갔고 합력하며 살았다. 이만하면 행복한 삶이다"고 감사를 표했다.

〈대종경〉 인과품을 생활 신조로 삼는 그는 "교법이 이 안에 다 들어있다. 미워하지 말고 다 용서하자"며 "내가 30년 전만해도 다음 생에는 가톨릭 신부가 되고 싶었다. 원불교가 너무 힘이 없고 가난해서 교무로서 욕심이 안 났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게 아니구나, 우리 회상의 앞길이 더 밝겠구나'를 깨닫게 돼 내생에는 전무출신이 되고 싶다"고 서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말한다. "우리 모두 대종사의 교법대로 실천하자. 형식적인 것이 너무 많다. 이름만 내세우지 말고 실제로 주인역할을 하자.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직책을 주자. 재가출가 나누지 말고, 오직 지자본위로 합력하자."

 〈약력〉
감산 고문기(鑑山 高文起)
-원기76년 대호법 법훈 수훈
-원기91년 종사 법훈수훈
-정릉교당 교도회장, 서울동부교구교의회 의장, 육영사업회장, 중앙교의회의장 봉직

[2019년 3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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