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보응의 이치에 바탕해
죄고의 근성이 되는 나쁜 습성을 고쳐
새 생활을 개척하는 공부길이 계문이며,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호해 주는 대종사님의 자비 울타리가 계문입니다.

박세훈 교무

[원불교신문=박세훈 교무] 부처님께서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아난다가 찾아와 향기에 대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 저는 혼자 숲에서 명상을 하다가 문득 이런 것을 생각했습니다."

모든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냄새를 풍기지 못한다. 뿌리에서 나는 향기나, 줄기에서 나는 향기나, 꽃에서 나는 향기는 다만 바람을 따라서 냄새를 풍길 뿐이다. 그렇다면 혹 바람을 따라서도 풍기고 바람을 거슬러서도 풍기고, 바람이 불거나 불지 않거나 바람에 상관없이 풍기는 향기는 없을까?

"부처님, 과연 그런 향기는 없을런지요?"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야, 네 말대로 뿌리의 향기나 줄기의 향기나 꽃의 향기는 바람을 따라 향기를 풍기지만, 바람을 거슬러서는 향기를 풍기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서도 풍긴다. 그것은 이런 향기다. 어느 마을에 착한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그들은 진실한 법을 성취하여 목숨이 다할때까지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고,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으며, 음행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으며, 술마시고 실수를 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을 보면 누구든지 어느 곳에 사는 아무개는 계율이 청정하고 진실한 법을 성취했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다. 이 향기는 바람을 따라서도 풍기고 거슬러서도 풍기며, 바람이 불거나 불지 않거나 관계없이 풍기는 것이다." <잡아함경> 제38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대산종사님은 수도인의 몸과 마음에서 향기가 풍겨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계율이 청정한 사람에게서는 향기가 납니다. 그 향기를 대산종사는 계향(戒香)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바람을 거슬러가는 향기,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나는 향기 계향(戒香)에 대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계문은 계율(戒律)의 조문(條文)을 뜻합니다. 그리고 계율(戒律)은 계(Sila)와 율(Vinaya)의 합성어입니다. 싼스끄리뜨어 쉴라(Sila)는 계(戒)로 의역(意譯)되는데 '자율적으로 규율을 지킨다'는 의미가 있으며, 싼스끄리뜨어 '비나야(Vinaya)'는 율(律)로 의역되는데 불교 교단의 질서 유지를 위한 규율로서 '타율적인 규율'의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합성어인 계율의 의미는 자신의 수도를 위해 스스로 경계함의 의미와 교단의 질서를 위해 법규에 따라 규율 있게 함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내가 없으면 마음이 허황하여져서 
계문을 등한히 여길 무리가 나올 것이다. 

대종사님은 계문을 무척 중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원기27년(1942) 겨울, 소태산 대종사가 개성교당을 순회하였습니다. 대종사가 이경순 선진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개성교도들 중에 유무념 대조법과 상시일기법을 실시하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 "아직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늙은 사람들에게는 유무념 대조법, 젊은 사람들에게는 상시일기법을 공부시켜라. 한 때 우 ―하고 많이 모여든다고 해서 그것을 발전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마음공부에 재미를 붙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몇 년이 지나서 들었던 말을 또 듣는다고 권태증을 느끼기 쉽다. 철새처럼 시세따라 잘 변하는 교도들이 아니라 마음공부 길을 잡고 꾸준히 수행 정진하는 교도들을 길러내야 한다. 특히 계문을 잘 지키도록 가르쳐라. 계문을 지키지 못하고서는 극락에 가지 못한다. 계문 범하고 죄받는 형상을 활동사진으로나 보여 주어야만 정신을 차릴지 모르겠다. 계문을 잘 지키면 지옥문이 닫히는 법이다."

대종사님께서는 왜 이렇게 계문을 중요시 하셨을까요? 

첫째, 계문을 지키는 삶이 인과보응의 진리에 맞게 사는 길이며 행복하게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주는 그 덩치가 크고 만물은 그 종이 다양하지만 결국 하나의 진리인 인과보응의 이치가 있어서 그 진리의 힘과 섭리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습니다. 인과보응의 이치에 바탕하여 죄고의 근성이 되는 나쁜 습성을 고쳐 새 생활을 개척하는 공부길이 계문이며,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호해 주시는 대종사님의 자비 울타리가 계문입니다.

1928년 교단 사업보고서를 보면 대종사는 "계문이 원불교 교리에 있어서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원불교 공부는 안하여도 사람이 사람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려니까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 계실 때였습니다. 어느 날 아난존자가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계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난아, 계를 지키게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후회스럽지 않게 하기 위해서니라. 만일 계를 잘 지키면 후회할 일이 없느니라." "세존이시여 후회함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아란아, 후회함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이니라." <중아함경>의 말씀입니다. 

인과보응의 진리에 바탕하여 사람답게 살기 위해, 행복하게 살기 위해, 후회하지 않고 살기 위해 우리는 계문을 지키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자들은 영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말씀으로 밝혀주시며 그 첫 번째 길로 계문을 주어 지키도록 하신 것입니다. 

계문을 범하는 자는 곧 나를 멀리한 자요, 
계문을 잘 지키는 사람은 곧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니, 
삼십 계문을 특히 잘 지키라" 

둘째, 계문을 지킴으로 인해 개인뿐 아니라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계문을 지키는 것은 자기의 행복과 성불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에 계문을 통해 일동 일정을 조심하여 엷은 얼음 밟는 것 같이 하여야 인도에 탈선됨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어업으로써 생계를 삼은 교도 한 명이 대종사를 찾아와 계문 첫 조항을 항상 범하게 되어 퇴굴심이 난다고 하니 대종사는 "그 한 계문을 비록 범한다 할지라도 그 밖의 스물 아홉계를 성심으로 지킨다면 능히 스물 아홉 선을 행하여 사회에 무량한 공덕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문은 개인에 있어서는 악행을 끊고 선행을 하여 세세생생 고를 여의고 낙을 얻게 하는 것이지만, 사회에 있어서는 무질서의 근원을 없애 평화의 사회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소소한 계문부터 중히 지키라. 
이 법을 우리가 중히 지켜야 세상 사람들이 중히 여긴다"

셋째, 일시적 통제를 거쳐 영원한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훈품 42장을 보면 대종사께서는 "참 자유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계율을 잘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란 책에서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나누고, 현재까지 대부분의 인간이 얻은 자유는 외부의 억압과 규제가 사라진 소극적 자유일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내면의 힘이 결여된 소극적 자유 안에서는 필연적으로 불안, 공허함, 무력감이 뒤따르기 때문에 안정감과 소속감을 줄 대상에 귀속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갈망했던 자유를 다시 버리는 모순적 행태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내면의 힘을 동반한 적극적 자유를 얻지 못하면 결국 구속받는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계문을 지키는 것은 내면의 힘이 결여된 '소극적 자유'에서 내 마음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인과의 법칙에 어긋나지도 않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으며, 주변에 은혜가 생산되는 '적극적 자유'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이러한 것을 대종사님은 '초학자의 위태로운 자유'와 '자각 있는 공부인의 자유'는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문은 하지 말라고 하며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못하게 함으로써 내면의 힘이 커져서 계문이 필요 없을 때 까지 우리를 보호해 주는 대종사님의 자비 울타리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앞으로 내가 없으면 마음이 허황하여져서 계문을 등한히 여길 무리가 나올 것이다. 계문을 범하는 자는 곧 나를 멀리한 자요, 계문을 잘 지키는 사람은 곧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니, 삼십 계문을 특히 잘 지키라" 하시며, "소소한 계문부터 중히 지키라. 이 법을 우리가 중히 지켜야 세상 사람들이 중히 여긴다"는 간곡한 부촉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계문은 구속이 아니라 죄짓지 않고 살게 하려는 성자의 자비이며, 계문 준수를 통해 우리는 소극적 자유에서 적극적 자유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후회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그리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계문을 소중히 여기고 중히 지켜야겠습니다. 

/안암교당

[2019년 3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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