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만남, 이웃종교에 호의적이며 공부하는 공동체
구한말 협동조합과 이타행, 4차 산업혁명시대 다시 기대

김학선 교수

[원불교신문=김학선 교수] 나는 가톨릭 신자로 원광보건대 간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원불교에 대한 나의 지식이라면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원불교에 온 마음을 다 빼앗긴 가까운 동료교수의 모습과 몇몇 정토 교수들의 모습, 그리고 인사를 나누는 교무님들과의 경험이 전부다. 그리고 감탄이 나올 정도로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수많은 성실한 미화여사님들의 모습에서 원불교의 정신과 사랑을 엿보곤 하는데, 그동안 가까이서 지켜봐왔던 원불교에 대한 느낌을 부족하지만 몇자 적어본다.

1985년 3월.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성당 옆 골목. 주택들 사이에 둥근 모양의 특이한 건물, 그 안으로 들어가는 특별한 복장의 사람들. 정갈한 쪽머리에 검은 치마 그리고 새 책을 펼칠 때 느껴지는 빳빳하고 주름이 없는 흰 저고리들의 움직임. 1920년대의 영화에서 나올법한 그런 사람들. 눈을 멈추고 이들은 누구일까 잠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천주교신자로서 중세의 복장 그대로의 수녀님이나 수사님들을 보아왔으니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대체로 종교는 전통을 중요시하니 구한말쯤 생겨난 종교인가 하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처음 원불교를 만난 기억이다.

2012년 2월. 익산시 신용동 원광대학교 봉황각 앞길. 원광보건대학교 간호학과에 교수임용이 확정되고 첫 나들이. 학교주변을 산책하던 내 눈에 들어온 봉황을 머리에 인 수덕호의 모습.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주는 안정감과 사이사이를 채우는 작은 수목에 감탄하고 이러한 교정을 사통팔달로 뚫어 놓은 혜안에 감사하며 걷던 길에 목마름을 살짝 채워주는 아담한 호수. 그리고 호수의 네 귀퉁이에 호법을 서는 듯한 네 개의 동상. 원불교도 불교의 한 갈래인줄 알았던 시절이라 부처의 형상은 이해하고, 공자나 소크라테스의 동상은 대학의 기개로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 이웃종교에 대한 원불교의 열린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훈훈함이다. 이것이 두 번째 만남의 기억이다.

2017년 5월. 총부초입의 마음&마음 카페 테이블. 간호학과의 원로버라는 원불교 스카우트 동아리 지도교수를 하면서 알게 된 교무님이 책 한권을 선물로 줬다. 〈소태산 평전〉 김형수 지음. 돈 버는 요령을 터득한 사람이 그것을 버리고 다시 가난한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조합을 만들자. 인내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는 지도력과 수위단을 만듦으로써 공적틀이 운동할 수 있는 객관제도를 구축함. 낮에는 제방축조공사를 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공동체. 경전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문자로 써야한다는 이야기 등등. 세 번째 원불교와의 만남이다. 

이렇게 만난 원불교가 8년에 접어든다. 선하고 성실한 모습들은 정말 아름답다. 인연이 서로의 끈을 이루니 다 같은 가족의 느낌이어서 정겨운 것도 참으로 좋아 보인다. 반면에 그러하니 먼 곳의 소식이 들어가기 어렵다는 생각, 사회 각 분야에 원불교인들이 녹아들어 보편적이고 다양함을 보여주기보다는 원불교 안에만 머물러있는 듯이 보였던 것은 어쩌면 만남의 시간이 짧았던 탓일 수도 있겠다. 개벽의 정신으로 시대를 앞서간 것이 원불교라면 매시대의 개벽이 무엇이었을까 그것도 궁금한 점이다.

인간은 세포로 구성된 유한한 유기체이지만 사고하고, 몸을 움직여 생산하고, 사회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이타적 행동도 할 수도 있다. 이러한 힘으로 인간은 생존하여 현재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자기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물질이 인간의 중심에 서있는 듯한 오늘에 이타적이기는 참으로 어렵지만, 이를 이끌어주는 데 종교가 큰 몫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덧붙인다면 구한말 어려운 시기를 협동조합으로 타개한 혜안의 정신과 실천이 21세기를 힘들게 넘어야하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다시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원광보건대학교

[2019년 3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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