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입교시켜 매월 유지비와 사후를 부탁하기
교단 언론지 우편으로 보내주기, 가족교화 일환

 

[원불교신문=박중훈 교무] 해마다 명절이면 수많은 귀성행렬이 이어진다. 올해도 어김없이 하루 700여 만 명이 그 행렬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시골에서 도시로 자녀를 찾아가는 역귀성도 이제 익숙한 풍속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 교당에도 설 명절에 부모님을 모시고 들른 자녀들, 그리고 설날 조상 향례에 참석한 외지 거주 자녀들이 꽤 있었다. 

교도들은 공을 들여 자녀들을 잘 가르쳐서 훌륭한 사회일원으로서 손색이 없도록 성공시켰다. 그런 자녀들이 설날을 맞아 고향에 왔다고 교당을 방문했지만, 인사이동으로 새로 부임한 나는 자녀들의 성장과정을 모르기도 하거니와 평소 거래가 없었기에 어색하기도 했다. 그 자녀들 또한 교무를 대하는 모습에서 공손함은 있지만, 합장 인사가 몸에 익지 않은 것을 보면 가족교화로 이어지지 않은 자녀들도 상당수 있음을 알수 있다. 

대체적으로 원불교는 가족교화가 기성종교에 비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편이다. 비록 법사·법호인이라 하더라도 손 자녀들까지 교화하여 일원가족이 되지 못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부모들은 오직 자녀의 성공을 바라며 뒷바라지를 했다. 그 결과 대체적으로 모든 자녀들이 대부분 부모의 품을 떠나 직장이 있는 수도권 지역으로 이동해 생활하다가 명절에나 고향을 찾는다. 때문에 부모의 신앙생활과 자녀들의 일상생활은 전혀 다르고 다만 혈연으로 이어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원불교와 전혀 인연 없는 사람을 교화하기 위해 공들이는 것에 비해 교도 가족에게 공들인다면 희망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산종사는 "소중한 인연에 두 가지가 있나니 혈연과 법연이라, 혈연은 육친의 가족이요 법연은 법의 가족이니, 혈연과 법연이 다 소중하나 영생을 놓고 볼 때에는 혈연보다 법연이 더 소중하나니라"고 말했다. 혈연을 법연으로 이어가는 교화는 우리가 인생삼난 중 하나인 '인간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날 수 있는 기연'을 손 자녀들에게 이어주고 내생에 내가 올 길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방법을 몇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물론 이미 실행하고 있는 교당도 있을 것이지만 정리해 보면 첫째는 '자녀 손자를 입교시켜 매월 유지비를 내게 하고 사후를 부탁하기'이다. 이 조항은 교도님이 몰래 하는 것이 아니라 손 자녀에게 반드시 알리고 승낙을 받아서 해야 한다. 비록 손 자녀들이 지금은 교당에 출석하지 않지만 그들을 우리 교당에 입교시켜 월 1만원 이상 유지비를 내게 함으로써 불연을 맺어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교당에 내는 유지비 1만원은 자녀의 실제 헌공성적이 될 뿐 아니라, 2차로 법연을 이어줄 수 있는 매개체가 될 것이다. 

둘째는 '매주 〈원불교 신문〉과 교당 〈법회 소식지〉를, 월말에는 〈월간 원광〉을 교당에서 우편으로 보내주기'이다. 교단 초창기 하성봉 교도는 결혼해 불법연구회 소식지를 받는 즉시 남편인 용산 김석규 대봉도의 서재에 가져다 놓는 방법으로 교화해 대종사에게 인도했고, 그 인연으로 딸 범타원 김지현 종사, 법타원 김이현 종사가 출가했다고 한다. 이런 아날로그 방식의 교화에 더해 디지털 시대에 맞게 '매주 법문 문자를 보내기'를 병행해보자는 것이다. 

셋째는 '명절이나 휴가 때에 손자녀들이 본가에 오면 교당 법회에 참석하고 조상 열반기념제나 명절제사를 교당에서 모시기'이다. 보통 교도님들 중 주말이나 명절 또는 휴가 기간에 자녀들이 본가에 오면 자녀들 식사준비로 법회를 쉬는 분들이 더러 있다. 지금은 열반한 서울교당의 어느 법사교도는 교당에 인연이 없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내가 일요일에는 교당에 가야하니 누구든 나를 교당에 데려다주고, 끝나면 다시 집에 데려다 주어야 한다"며 손을 내밀었고, 교당에 일이 있으면 자식과 며느리를 심부름 시켰다. 박사 아들과 며느리는 그렇게 인연이 돼 지금은 법호까지 받은 신심 깊은 교도가 됐다. 

교도님들의 가족인연 교화가 중요한 것은, 최소한 불연 깊고 신심 깊은 교도들의 가족이 일원상 진리를 믿고 닦아 죄와 복이 어디서 오는지, 근원을 알기 위함이다. 그렇게 파란고해에 들지 않고 낙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읍교당

[2019년 3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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