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혜성 교무] 그러니까 문제는 '나'였다. 오후 1시 30분부터 손님들이 오기로 되어있다. 하지만 손님이란, 우리가 예상하는 시간에 오는 존재가 아니다. 도착 순간이 '오는 시간'이 되기에, 일찍 도착하는 손님을 위해선 일찍 준비를 마쳐야 한다. 하지만 아직 세팅이 마쳐지지 않았고, 점심을 먹는 중에도 내 마음은 한량없이 바쁘다. 앞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순차적으로 '착착' 소리를 내며 머릿속을 뛰어다닌다. 밥을 후다닥 먹고, 뛰어 올라와 일을 시작한다.

한참 일을 하다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왜 안 오지? 이건 혼자 하기 벅찬데? 뭐, 어디선가 다른 일을 하고 있겠지" 여기도 급하긴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이다. '다른 곳도 손을 넣어야 할 곳들이 많으니, 일단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먼저 하고 있어야겠다' 생각한다.

세팅을 하다가, 주방에 물건을 가지러 간 나는 깜짝 놀랐다. 같이 일을 해줄 사람들이 아직도 식사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밥을 빨리 먹고 싶어서 빨리 먹고 올라왔나. 나는 앉아 있기 싫어서 뛰어다니나. 지금 시간이 넉넉하다고 생각하나?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여태 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이 그 이야기 할 때는 아니지 않은가?'

바삐 뛰어다닌 농도만큼 마음이 한껏 요란해진 나는 오만가지 생각을 쏟아내고 있다. 생각이 또 생각을 물어온다. 

마음이 서운함까지 다다르니, '이건 아니다.' 스스로 멈춘다. '내 마음의 평화를 빼앗기지 말자' 타인으로 인해, 내 마음의 평화를 빼앗길 필요는 없다. 내 마음의 평화를 빼앗아갈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평화를 되찾아야, 사고가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마음을 멈추고 나서, 다시 차근차근 생각한다. 일은 단지, 일이다. 판단은 서로 다를 수 있다. 나는 마음이 급해도, 상대는 급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일이 중요해도 상대는 관계가 중요할 수 있다. 나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해도 상대는 넉넉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맞다 생각해도 상대는 상대가 맞다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앉아 있어야만 할,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한사람인데 상대는 다수다. 다수의 판단과 나의 판단이 다르다면, 누가 누구에게 맞춰야 하는 걸까? 되려, 내가 맞춰야 하는 것은 아닐까? 왜 멍청하게 일은 일대로 하고, 화는 화대로 내는가. 이건 누구에게도 이득이 없는 일이다. 끊임없이 생각해보니 놀랍게도 온통 나, 나, 나다. '나'가 생기자 '상대'가 생겼다. '상대'가 생기니 마음이 요동한다. 

대산종사는 "풍랑을 만났을 때 사람을 많이 실은 배는 전복하기 쉬우나 짐을 많이 실은 배는 전복할 염려가 크지 않나니 그 까닭은 짐은 움직임이 없으나 사람은 요동하기 때문이니라"고 법문했다. (〈대산종사법어〉 신심편 39장)

그러니까 문제는 '나'다. 짐이 되어버리면 된다. '나 없음'으로 있으면 된다는 거다. '나'가 생기니 '상대'가 생기고 마음이 요동치는 거다. 일을 완벽하게 하고 싶어 하는 나, 성미가 급한 나, 내 판단이 옳다고만 생각하는 나, 내 속에 '나'가 너무 많다. 짐이 되자. 큰 숨을 한번 들이쉬고 나니 경계는 나의 현주소를 비춰주는 거울일 뿐이구나. 그래, 그래서 은혜.

/교학대서원관

[2019년 3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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