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 이정택 원로교무/ 사대강령 2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교리적으로 살펴볼 때 우리 교단은 무엇을 세상에 이루려 하는가. 사대강령이 교법의 핵심이 된다면 강령을 통해 원불교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최초 〈불교정전〉에는 진충보국이란 용어로 무아봉공을 대신했는데, 당시 친일적 성향이라는 시비가 있기도 했다. 어떤 이유였는지, 아울러 원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란 무엇이고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지난 교리문답에 이어 알아보고자 한다.

-〈불교정전〉을 보면 '몰아 말하자면 정각정행하고 지은보은을 하고 불교보급을 하는 것은 무아봉공을 하기 위함이다'고 설명했다. 사대강령의 핵심이 '무아봉공'인가
소태산 대종사는 일찍이 이 세상이 크게 병들었다고 보았으며, 그 원인 가운데 하나를 공익심 없는 것으로 말씀했다. 〈정전〉 병든 사회와 그 치료법에서 '이로운 것은 저 사람에게 주고 해로운 것은 내가 가지며 편안한 것은 저 사람에게 주고 괴로운 것은 내가 가지는' 공익심이 없고 이기주의에 바탕해 생활하기에 사회가 병들어 가고 있다고 말씀했다. 

일상 수행의 요법에서도 마지막 9조를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로 강조함은 결국 무아봉공으로써 병든 사회를 치료해 가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 교단이 대사회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목표라 할 것이다.

무아봉공이란 개인을 놓고 인류와 사회를 위해 심신을 바치는 것에 숭고한 의미을 강조한 것이다. 시방일가 대세계주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니 무아봉공의 심경은 공중의 법도를 지키고 자리이타로 공을 위해 낱 없이 심신을 활용하는데 그 의미가 크다. 해방을 맞았을 때 우리 교단이 전재동포구호사업의 희생을 보여준 모습이 무아봉공의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대부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집착을 갖는데, 무아라 하는 것은 가족주의의 울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봉공이라고 하는 것은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행으로써 모든 중생을 도와주며 함께 잘사는 공도사회를 이루는데 성심성의를 다하자는 것이다.

-초기 〈불교정전〉을 펴낼 때 사대강령 중 '진충보국'이란 강령으로 교리도가 만들어졌다. 후에 이 강령이 '무아봉공'으로 변화됐는데 배경을 설명하자면
원기17년 4월에 발간된 원불교 최초의 경전인 〈육대요령〉은 대종사의 사상이 비교적 자유롭게 표현된 반면, 원기28년 8월에 발간된 <불교정전>은 불교용어의 유입이나 불법연구회 정체성의 훼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원기25년 9월부터 시작된 〈불교정전〉 편수사업은 원기27년에 마쳐졌는데, 그때의 정황은 〈대종경〉 부촉품 3장에도 밝혀져 있다. 대종사가 친히 편찬한 이 〈불교정전〉은 처음 출판허가를 신청했을 때 일제로부터 불허를 받았다. 이유인 즉 황국선양 정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원기28년 3월에 인쇄에 회부됐으나, 당시 편집인 겸 발행인을 불교의 김태흡 스님의 이름을 빌려 발행했으며, 발행소도 불교시보사에 의해 이뤄졌다. 불법연구회의 이름으로 발행하지 못했다. 또한 3월에 인쇄회부가 됐지만, 발행은 대종사 열반 후인 8월에서야 나오게 된다. 

소태산 대종사의 열반 후 시국의 동요가 가중되고 회중의 체제 유지마저 불안하게 됨에 따라 일제는 불법연구회가 불교단체로서 손색이 없었다고 봤고, 황국선양의 홍보 성격이 강한 교서로써 간행해도 좋을 것이라는 의도가 있었다.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용어는 이때 발행된 〈불교정전〉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그 뜻은 '충성을 다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다. 일본인들이 보기에는 우리 교단이 일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돼 출간을 허용했지만, 대종사는 '주자가 충을 진기지심(盡己之心)으로 해석했다'며, "충성이라는 것은 임금에게만 하는 충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의 정성을 다하는 것이 충이다"고 지도했다. 

후에 이 진충보국이 무아봉공의 용어로 변화됐는데, 대종사가 본래 가르치려한 의미가 무아로써의 봉공이다. 진충보국이나 무아봉공에서 대종사가 밝히려 했던 것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병든 사회를 진단해 치료하려 했던 것이다. 친일적 행적이 아니라 대종사가 시급히 교서를 정비하려 했던 가운데의 방편이었다.

-무아를 말하면 혹 전체주의적 사고를 생각하기도 한다. 때문에 대를 위해서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처럼 오해한다
대산종사는 '나는 남을 나로 알고 산다'고 말씀해 이 내용이 〈성가〉 138장 '나 없으매'의 성가가 됐다. '나 없으매 큰 나, 내 집 없으매 천하가 내 집'이란 가사에서 볼 수 있듯, 타인과 나를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는 관점이다. 나를 버리라는 뜻은 단체를 위해 무조건 나를 희생하라는 강압적 의미가 아니라,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고 내 가족 내 형제 처럼 볼 때 '큰 나'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대아(大我)에 합일된 생활이 될 때 무아(無我)가 되는 것이며, 이렇게 진아(眞我)에 합일된 심경이 됐을 때 무아지경(無我之境)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대종경〉 예화의 '경편철도를 소유한 이야기'와 '허공법계를 자기소유로 이전등기 낸 사람'의 이야기로도 알 수 있듯, 작은 나를 버리고 큰 나를 찾으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국한이 큰 사람이 만유의 주인인 것이다. 이같이 만유의 주인이 된 마음이라야 무아로써 봉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산종사는 진실무아, 수세무아, 맹종무아의 법문을 말씀했다. 어떤 의미인가
이 법문은 좌우에 치우치지 않고 가르치는 것이 종교의 대의임을 밝혀준 것으로, 진실무아(眞實無我)란 일체의 삿된 욕심을 떠나서 국가와 세계를 위해 일하는 것으로 우리 교단에서 가르치는 본위라 설명했다. 

수세무아(隨勢無我)란 그때그때의 권세에 의지해 자기의 이욕을 추구하는 것이며, 맹종무아(盲從無我)란 자기의 주견과 비판이 없이 맹목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정산종사는 자신의 주체성과 주관이 뚜렷한 가운데, 어느 곳에도 흔들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진실무아의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된다. 

소태산 대종사는 '천지의 지극히 공정한 도'를 설명하며, 만사를 작용할 때에 원근친소와 희로애락에 끌리지 아니하고 중도를 잡으라 했으며, 대산종사는 중도행을 '육근을 작용할 때에 불편불의하고 무 과불급행'이라 설명했다. 이런 가치관이 진실된 행동의 무아가 된다고 생각한다.

-지공무사를 설명하자면
대산종사는 공부인으로서 공사(公私)에 대한 공부표준에 대해 '빙공영사(憑公營私)로 나의 본의를 잃은 생활인가, 선공후사(先公後私)로 대의를 잡은 생활인가, 지공무사(至公無私)로 순전히 공을 위한 생활인가를 나날이 살펴보라'고 말씀했다. 

빙공영사란 공을 빙자해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것을 말하며, 선공후사란 공적인 일을 먼저하고 사적인 일은 나중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살아가면서 공중과 공익을 위한 공적 책임과 자기 자신이나 가족 등을 위한 사적 책임을 원만히 하는 것이 원칙이나, 선공후사가 표준된 이는 공사와 사사가 동시 발생하면 공사를 우선적으로 하고 사사를 뒤에 한다. 

지공무사란 지극히 공정해서 사사로움이 조금도 없는 것으로, 지공무사가 표준된 이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매우 공평해 조금도 사사로움에 떨어지지 않는다. 대산종사는 나날이 자기 자신을 살펴 선공후사를 표준으로 하되, 궁극에는 지공무사가 되도록 수행·적공을 하는 것이 공부인의 본분이라 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대종경선외록〉을 통해 위법망구(爲法忘軀), 위공망사(爲公忘私), 즉 법을 위하여서는 몸을 잊고, 공을 위하여서는 사를 놓는 대의의 기풍을 길이 진작하라고 가르쳐 줬다. 이것이 지공무사의 심법인 것이다. 

[2019년 3월8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